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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 누가 제 역할을 하는가?
 
2008-08-14 17:09:34

 

서울 강남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필자의 친구는 얼마 전 동네의 신문보급소장 때문에 경찰을 부른 적이 있다. 그의 신문구독요구가 하도 집요하고 위협적이었므로 준법사회를 믿는 내 친구가 지구대 경찰을 불러 이를 피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새파란 경찰관에게서 훈계만 들었다고 한다. "이런 집에 사는 분이 신문 하나 더 볼 형편이 안 되느냐, 있는 분이 양보해서 좋게 해결하고 경찰까지 부르지 말라"고.

결국 이 경찰관은 경찰이 아니라 로빈 후드(Robin Hood)가 되려고 온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국회, 공영방송, 학교, 노동조합, 기타 어디서나 이 경찰관처럼 직무를 정치적으로 처리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2개의 좌파정권을 거치며 받은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한 번 더 좌파가 집권한다면 우리는 모두 생업보다 이념투쟁에 더 광분하는 전체주의 국민이 될지 모른다.

현대의 시민사회에서는 자기의 직무에 충실한 사람들이 자신을 향상시키고 사회적 직분도 다하게 된다. 선진국의 특징은 이런 직업정신이 상식적 현상으로 자리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MBC 'PD수첩' 같은 조작방송은 선진국에서 존재할 수가 없다. 언론종사자 스스로 이런 행위를 상상조차 안 하겠지만, 국가기관과 이해당사자가 그 결과에 대해 가차 없이 책임을 지우기 때문이다. 정치가·교사·노동자, 기타 누구도 자기 직무를 일탈하면 존재할 수 없다고 인식하며, 이런 사회적 인식이 건전한 직업정신을 키우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 점에서 갈 데 없는 후진국이다. 후진국의 특징은 법치와 원칙이 실종되어 쓰레기를 치우는 자정(自淨) 기능이 마비되는 것이다. 과학과 이성을 뿌리부터 부정하고 조작한 광우병 촛불집회가 90일 넘어 지속되는데도 그 창조자인 'PD수첩'이나 KBS 사장은 아직도 건재하고, 이들이 오히려 검찰소명이나 해임제청을 무시해버리는 것이 오늘의 한국 사회다. 이런 사이비(似而非)가 정치·경제·교육·문화 어디서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한국에서는 합리와 상식에 바탕을 둔 시민사회가 성립할 수 없다.

본래 좌파들은 시장민주주의에서의 경쟁능력보다 선동능력을 통해 생존하려는 집단이다. 이들에게는 투명한 경쟁과 법질서가 가장 큰 적(敵)이므로 안정된 사회구조를 뒤흔드는 조작·선동·탈법·폭력 등이 중요한 생존의 무기가 된다. 이들이 노리는 것은 선동이 먹히는 대중, 협박에 움츠리는 기업, 기회주의적인 지식인, 눈치 보는 공권력, 인기에 영합하는 정부다. 선진국에서라면 광우병 불법시위에 대해 즉각 국민은 코웃음치고, 기업은 광고를 취소하기는커녕 고발과 소송으로 대응하고, 언론은 그 허구성을 파헤치고, 경찰은 사정없이 진압하고, 대통령은 철석 같은 법치와 원칙으로 사태를 다스릴 것을 전 국민에게 천명했을 것이다. 이 중 하나라도 있었는가?

따라서 과거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얼마나 성취했건 한국은 후진사회임을 면할 수 없다. 우리가 이 굴욕적 상황을 탈출하는 길은 모든 국가사회 기능을 하나하나 제자리로 돌려놓는 길밖에 없다. 실상 이것은 원칙과 용기 있는 결단만 있으면 되는 일이다. 지난달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PD수첩'의 왜곡사례를 일일이 지적하고 "시청자 사과" 명령을 내렸다. 비록 사건 후 78일이나 지난 뒤의 처리였지만 당시의 험악한 사회분위기 아래 심의위원 9명 중 3명이 퇴장하고서 내린 의연한 결정이 광우병 희극을 정리하는 시발점을 마련했다.

이명박 정부는 '선진사회'를 만든다며 출범했지만 실상 선진사회는 국민 각자가 만드는 것이다. 대통령이 이에 기여하는 길은 공권력에 제 역할을 시켜 법과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가 이 상식적인 역할에 실패한다면 이 정부의 수많은 선진화 청사진은 물 위에 그린 그림에 불과할 뿐이다.

♤ 이 글은 2008년 8월 10일자 조선일보 [시론]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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