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선 칼럼

  • 한선 브리프

  • 이슈 & 포커스

  • 박세일의 창

[전상인] KTX 시대의 문화적 음영
 
2008-07-25 11:36:38

KTX 시대의 문화적 음영

 전상인 (한반도선진화재단 정책위원 / 서울대 사회학 교수)
 
 
고속철도(KTX)가 개통된 지 4년을 넘기면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크게 달라지고 있다. 가령 서울에서 불과 1시간 50분 거리로 가까워진 대구를 직접 찾아가는 일이 과거에 비해 훨씬 늘어났다. 그건 주로 경조사 때문이다. KTX가 있기 전에는 굳이 대구까지 내려가서 축혼(祝婚)이나 문상을 하지 않아도 친지나 친구들은 길이 멀어서 그렇겠거니 하며 이해하는 듯 했다. 하지만 요즘 그랬다가는 성의 부족이라며 약간 서운해 하는 눈치다.

KTX 덕택에 고향이나 지방을 지척(咫尺)에 둘 수 있게 된 기술적 진보 자체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문제는 의도적이든 결과적이든 그것이 수반하는 사회적 부작용이다. 예컨대 KTX 개통 이후 대구나 부산에서 서울지역 대학병원을 찾는 외래환자가 급증했다고 한다. 서울시내 유명 백화점에도 지방에서 오는 손님들의 숫자가 크게 늘었다고 하며, 서울 소재 대학들의 야간 교육과정에도 KTX 통학생들이 요 근래 눈에 띄게 많아졌다.

가속화되는 서울 집중현상

빠르게 편해진 교통 탓에 지방에 대한 서울의 소위 '빨대 효과'는 점점 더 막강해지고 있다. 누군가는 대구(大邱)를 '서울특별시 대구(大區)'라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어찌 대구만 사정이 그러하겠는가. 광주, 대전, 춘천 할 것 없이 사실상 전국의 모든 도시들이 서울로 빨려드는 처지로 전락하고 있다. 이는 결코 경제적인 측면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보다 심각한 것은 전국적 혹은 세계적 체인망을 갖춘 편의점이나 극장, 서점, 학원, 레스토랑 등에 의해 모든 도시의 문화적 평준화와 획일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세기 초 근대화와 함께 철도시대가 본격화될 무렵, 유럽사회는 커다란 사회심리적 충격에 빠졌다. 당시 영국의 열차 평균속도는 시속 40㎞ 안팎에 불과했지만 우편마차의 그것보다 세 배 가량 빠른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속도에 의한 공간파괴를 불안하게 느꼈다. 독일의 작가 하이네는 모든 나라에 있는 산들과 숲들이 파리로 다가 오고 있는 듯하다면서 자기 집 문 앞에 북해(北海)의 파도가 부서지고 있다고 썼다. 철도연결망의 보급은 새로운 공간을 열기도 했지만 개별 지역의 내밀한 정체성 혹은 독자적인 아우라를 파괴시킨 것이다. 철도의 발전은 말하자면 지방의 문화적 가치절하를 위한 전주곡이었던 셈이다.

21세기에 들어와 열차의 속도는 그 때보다 10배 쯤 빨라졌고 대한민국 또한 세계 유수의 고속철도 보유국이 되었다. 이러한 기술적 발전이 초래하는 이점을 무조건 부인할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전국이 서울을 중심으로 불과 2시간 남짓 생활권으로 재편되는 작금의 추세가 문화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 우리 사회가 너무나 무심한 상태로 남아있다는 점은 자못 안타깝다. 무엇보다 이는 지역 특유의 장소성(placeness)을 소멸시킨다. 똑 같은 패스트푸드를 먹고 동시개봉 영화를 일제히 보는 일이 일상화되는 순간 대구와 광주, 혹은 부산의 문화적 차별성은 더 이상 존속하기 어렵다. 토산품이 고향을 잃은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로써 호두과자는 더 이상 천안의 명물이 아니다.

수도집중형 교통체계

게다가 현재의 KTX 체제는 기왕의 서울 중심성을 보다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다. 언필칭 탈근대시대의 지방화 혹은 세계화를 말하면서도 우리나라의 교통체계는 아직도 수도집중형 근대 국민국가 시대에 머물러 있다. 그저 모든 길이 서울을 통하다보니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21세기 문화적 트렌드를 우리 스스로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한국문화는 서울문화 한가지로 단순화되고 교조화될 수밖에 없어 문화의 대외경쟁력에 큰 힘이 실리지 않는 것이다.

문화적 다양성의 보존은 물론 문화의 경제적 가치 함양을 위해서라도 현재와 같은 초고속, 초광역 위주의 시공간 국토체제는 한번 쯤 재고될 필요가 있다. 빠른 것과 느린 삶의 병렬적 공존, 열린 공간과 닫힌 장소의 보완적 공생이 힘들어지는 상황에서는 자발성과 독자성 및 진정성에 기초한 문화 본래의 존재 근거를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명은 자칫 문화를 해칠 수도 있다.
♤ 이 글은 2008년 7월 14일자 부산일보 [부산일보/시론]에 실린 글입니다.
 
  목록  
번호
제목
날짜
425 [이홍구] 헌법 논의와 사회계약 08-07-28
424 [권영준] MB노믹스에 대한 미련을 버려라 08-07-25
423 [유호열] 북한인권법을 제정해야 하는 이유 08-07-25
422 [전상인] 대한민국의 미래, 분권과 자치에서 08-07-25
421 [전상인] KTX 시대의 문화적 음영 08-07-25
420 [손기섭] (내 생각은…) 일본이 자꾸 독도를 건드리는 이유 08-07-24
419 [박영범] 양질의 일자리 창출 가로막는 法制 08-07-21
418 [김영봉] '광우병 방송', 시장 개혁 차원에서 심판해야 08-07-21
417 [안세영] 국정 혼란의 블랙박스 속엔 08-07-17
416 [유호열] 등뒤서 총맞은 남북관계 08-07-17
415 [강석훈] '달러 폭탄'으로 환율을 내리겠다고? 08-07-14
414 [이인호] ‘대통령 기록물’ 주인은 국민이다 08-07-14
413 [이인실] 공기업개혁 국회서 풀어라 08-07-11
412 [정재영] 그래도 기업이 희망이다 08-07-09
411 [강경근] 헌법 제1조를 욕되게 하지 말라 08-07-09
410 [현진권] 촛불 속의 재산권 보호 08-07-08
409 [이홍구] 7·7 선언과 민족 공동체 통일 08-07-08
408 [조영기] ‘촛불’이 서민을 불태우고 있다 08-07-07
407 [박정수] 공기업 개혁, 대통령 지지도 봐가며 할 일 아니다 08-07-07
406 [이승훈] 경제살리기= 법치·탈규제·감세 실현 08-07-07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