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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인] 대통령, 길 위에서 길을 잃다
 
2008-06-18 18:11:05

대통령, 길 위에서 길을 잃다

전상인 (한반도선진화재단 정책위원 / 서울대 사회학 교수)

 
2048년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굴지의 강대국이 되었다.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며 오늘의 영광에 이르게 된 역정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대견하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건국에서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까지 근대화의 대장정을 거뜬하게 이뤄냈던 대한민국이 끝내 선진국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 나라의 갈림길은 건국 60주년을 맞았던 2008년 전후였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은 10년간의 진보좌파 정권을 심판하고 실용과 선진화를 내세운 보수우파 권력에 새로운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희망은 100일을 넘기지 못했다. 발단은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미국과의 미숙한 협상과 국민과의 미흡한 소통이었다.
 
그런데 노련한 진보세력은 이런 실수와 약점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마침내 광우병 논란이 과거 6월 민주항쟁의 추억과 겹쳐지면서 사람들은 직접민주주의의 재미에 한없이 빠져들었다. 그 이후 대한민국은 길을 잃었다. 아니 길이 있어도 갈 수가 없었다.
이명박 정부의 시련에는 시기적으로 불운한 측면도 있었다. 이전 정권이 풀다 만 숙제와 묻어둔 지뢰가 도처에 남아 있던 집권 초기에 유가 폭등과 같은 밖으로부터의 악재가 정권의 대표 브랜드인 ‘경제 살리기’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최종 책임은 역시 자신의 몫이다. 이명박 정부의 결정적인 패인은 정권교체의 시대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대한민국의 체제적 위기에 둔감
 
무릇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체제 재생산을 위한 장치와 노력에 달려 있을 터인데 대한민국은 이 문제를 가벼이 여겼다. 우선 자본주의 시장경제 및 민주주의 법치국가의 이상을 제대로 구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압축 근대화 과정에서 마치 내일은 없다는 듯 부와 권력의 기회주의가 성행했다. 시장경제와 법치국가의 원칙에 충실한 것이 비록 당장에는 불편하더라도 체제의 장기 지속 가능성을 높인다는 원리를 깨닫지 못한 결과였다.
 
대한민국의 상류계층은 체제의 안정과 재생산을 위한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숨은 기능에도 무지했다. 한국적 근대화 모델의 수혜자로서 그들은 낙오집단이나 소외계층에 더 많이 베풀어야 했다.
 
이를 게을리 한 대가로 그들은 국민적 적대감을 자초했고, 기득권을 지키고 빼앗는 과정에서 이념갈등은 필요 이상으로 첨예화되었다. 여기에 가세한 것이 대한민국의 소리 없는 침몰이었다. 언제부턴가 그 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국가에 대한 자학(自虐)을 일삼으며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세계화를 경계하는 문화적 정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가령 당시 지식인들은 건국 60주년을 맞는 동안 대한민국 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책으로 ‘자본론’과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1, 2위로 꼽았다(교수신문 2008년 4월 14일). 이런 나라에서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말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외치는 것에 과연 큰 힘이 실렸겠는가. 하긴 19세기 말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지나간 길은 ‘진로’라고, 신미양요 때의 미국에 대해서는 ‘침입로’라고 정교하게 구분한 역사교과서가 그 무렵 학교현장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고 하니 국민 다수가 모든 미국 소를 미친 소로 생각한 것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돌이켜보건대 이명박 정부는 이와 같은 대한민국의 체제적 위기 혹은 지속가능성 문제에 무심하고 둔감했다. 자신의 집권을 보수 전체의 재정비와 새 출발을 통한 대한민국의 성공과 국민 모두의 승리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에 소홀했던 것이다. 특히 대선 캠프를 연장시킨 정부 또는 고소영·강부자의 나라는 대한민국 백년대계(1948∼2048년)에서 2008년이 차지하고 있는 중차대한 역할과 크게 동떨어져 있었다.
 
역사의 罪人될까, 義人될까
 
그 즈음 대한민국의 화려한 재기(再起)를 기약할 만했던 계기가 한 번은 있었다. 이른바 MB판 6·29선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20여 년 전 6·29 민주화 선언과 달리 시대적 분위기와 대중적 정서에 편승하는 무조건 항복이 아니어야 했다. 대신에 뒤늦게나마 국정의 원칙과 미래의 비전을 지혜롭고 용기 있는 최고지도자의 모습에 담아 보여주는 것이어야 했다. 디지털 민주주의시대의 ‘영리한 군중(smart mob)’이 반드시 ‘현명한 군중(wise mob)’은 아니기 때문이다.
 
2008년 6월,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의 죄인과 의인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 이 글은 2008년 6월 18일자 동아일보 [동아광장]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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