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승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취임 100여일만에 대통령이 성난 민심으로부터 퇴진 요구를 받는 시국은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것 같다. 경제학자로서 이렇게 상황이 악화된 원인 중 하나로 경제문제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광우병으로 시작된 촛불집회에 기름을 부은 것은 정부의 안이한 대응이지만 그 바닥에는 민생이 있다.
국민생활에 가장 밀접한 물가와 일자리 지표가 최근 최악의 성적을 나타낸 것이 그 반증이다. 4.9%(작년 동월 기준)로 뜀박질한 5월 소비자물가도 걱정이지만 생산자물가는 11.6%나 치솟았다. 외환위기 이듬해인 1998년 10월 생산자물가가 11.7%에 달한 이후 10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생산자물가만 본다면 외환위기 때와 비슷한 위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고속성장을 하는 중국도 같은 달 생산자물가 상승률이 3년 만에 최고치인 8.2%를 기록해 호들갑을 떨고 있으나 우리와는 상대가 안 된다. 생산자물가는 두세 달 후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사태가 예사롭지 않다.
고용사정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벌써 몇 달째 최악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취업자 수가 18만여명에 그쳐 작년 동월(29만여명)에 비해 1년 새 10만명 넘게 줄었다. 기획재정부가 진단한 것처럼 임시일용직을 중심으로 취업자 수가 감소한 게 사실이라면 국민의 생활고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하반기에도 경제사정이 여전히 안갯속이란 점이다. 정부가 연일 숨가쁘게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과연 이 정책들이 얼마나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지난 8일 10조원이 넘는 사상 초유의 세금환급 고유가대책을 시작으로 11일 중소기업 지원, 지방 미분양 해소, 저소득층 이동통신 통화료 인하, 수도권 군사시설보호구역 해제 등 굵직한 정책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뒤늦게 떠나간 민심을 잡으려는 고육책이겠으나 솔직히 역부족이라는 생각이다.
사실 현재 경제상황이 정책을 무더기로 내놓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국민도 잘 안다. 글로벌 환경에 완전 노출된 우리 경제가 세계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비켜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일자리 문제다. 외환위기 전인 1993∼97년 49만5000개였던 우리나라의 연평균 일자리 창출 개수는 외환위기 이후인 2002∼07년 약 31만개로 축소됐다가 최근엔 20만개를 밑돌고 있다. 이런 고용환경 변화는 쉽게 개선되지 않는 구조적 문제다. 하루아침에 이명박 정부의 정책 실패로 생겨난 문제가 아닌 것이다. 2000년에만 해도 국내총생산(GDP)이 10억원 증가할 때마다 신규 근로자가 17.6명 늘었으나 매년 꾸준히 하락해 2006년에는 7.9명으로 떨어졌다. 이 여파로 ‘고용 없는 성장’에 따른 청년실업이 고착화된 지 오래다. 15∼29세 청년실업률은 전체 실업률의 두 배가 넘는 7.5%이며 구직포기자 등을 포함할 경우 10%를 웃돈다.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가 도래했지만 실직 가장 200만명, 백수 가장 100만명의 어두운 그늘이 점차 짙어지고 있다.
그래서 지난 대선에서 경제를 살리겠다는 이명박 후보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던 것이다.
하루빨리 지금의 경제 위기상황을 치유할 종합처방이 마련돼야 한다. 그러자면 먼저 소고기 문제부터 끝내야 한다. 국민이 납득할 만한 수준의 소고기 대책을 제시한 뒤 새로운 각오로 다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런 연후에 정책 물량공세보다는 국민의 피부에 와닿는 경제정책의 밑그림을 그리고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내놔야 한다. 그것은 정부 일방통행식이 아니라 광우병 사태의 값진 교훈에서 보듯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어야 한다.
♤ 이 글은 2008년 6월 12일 세계일보 [오피니언]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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