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12 19:09:04
‘6·15 선언’과 남북의 현실
유호열(한반도선진화재단 남북문제팀장,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최근 어수선한 국내 상황에서 과거 김대중 정부 시절 대북정책을 추진했던 핵심 인사들의 잇단 발언이 주목받고 있다. 그 시절 국정원장과 통일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햇볕정책의 전도사임을 자처했던 임동원씨는 지난 8일 재임 중 자신의 역할과 관련 사실들을 담은 회고록을 펴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비서실장이었던 박지원씨는 11일 서울대에서 열린 ‘6·15 연석회의’ 초청 특강에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얽힌 비사를 털어놓았다. 햇볕정책의 창시자이자 6·15 정상회담의 주역이었던 김 전 대통령은 10일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행한 연설에서 최근 경색된 남북관계의 해법으로 이명박 정부가 조속히 6·15와 10·4 선언 계승을 선언하고 쌀과 비료 제공을 천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전 대통령과 임씨, 박씨 등 3인은 과거 햇볕정책의 성과를 부각시켜 자신들의 역할이 시대적 소명이었음을 강조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동시에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햇볕정책 이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다고 주장했다.
과연 이들의 과거사 회고는 정당한 것이며 현 상황에서 햇볕정책 이외에는 대안이 없는 걸까. 유감스럽게도 3인의 주장은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 없으며 햇볕정책의 공과는 이미 지난 대선에서 국민이 엄중하게 심판했다. 현 시점에서 남북관계를 더 이상 견인할 수 없는 용도폐기된 정책이라 하겠다. 남북정상회담의 대가로 북쪽에서 15억달러를 요구했으나 김대중 정부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고 하지만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요구대로 구조조정이 시행되던 시기에 현대 측이 송금한 5억달러와 정부의 예산은 주머닛돈이 쌈짓돈 아니었던가. 남북정상회담 성사와 관련해 2000년 초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던 박씨와 현대 측의 대북접촉 사실을 당시 국정원장인 임씨도 몰랐었다는 사실은 비선 접촉을 통한 남북관계 파행의 원조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2000년 3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결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김 전 대통령이 천명한 ‘베를린 선언’이 발표되기 전에 판문점을 통해 북측에 미리 전달됐다는 사실은 국민을 무시한 채 남북 당국이 짜고 친 고스톱이란 생각마저 든다. ‘햇볕’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이런 음산한 정책들은 결국 국내외의 온갖 불신과 의구심만 불렀다.
정상회담이 불투명한 방식과 모호한 합의로 추진되었기에 6·15 공동선언의 역사성과 진실성을 햇볕론자들의 주장처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정상회담 개최 일정이 변경된 것이 남측 언론의 사전 공개 때문이라면 현대의 대북송금 일자와 정상회담 일정 변경의 상관성을 설명하기가 궁색해진다. 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회담 직전 김일성 시신 참배문제에 대한 김 위원장의 용단으로 가능했다면 회담 추진 주역의 감격 어린 눈물은 마땅히 주권국가의 체면과 우리 국민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한 쓰라린 눈물이었어야 했다. 주한미군이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군대로서 주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북한 당국과 언론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은 북쪽 인민의 감정을 달래려는 것이란 궤변은 김 위원장만이 할 수 있는 발언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정상회담 후 개설된 핫라인을 통해 남북관계의 핵심 사항들이 논의됐다는 주장은 사실일 것이나 2002년 연평해전이 아랫사람들이 도발한 우발적 사건이란 거짓까지 진실로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북한의 농축우라늄 비밀 개발 계획에 대한 미국측 주장은 믿지 않으면서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주한미군 탓이라는 북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통미봉남(通美封南)을 경계하기에 앞서 통북봉미의 과오를 반성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6·15 8주년을 앞두고 햇볕론자들은 자신들의 주장과 업적을 변명과 궤변으로 정당화할 게 아니라 남북관계의 역사성과 진실 앞에 좀더 겸손하고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2008년 6월 11일자 세계일보 [오피니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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