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선 칼럼

  • 한선 브리프

  • 이슈 & 포커스

  • 박세일의 창

왜 공동체자유주의인가- 회의론에 대한 답변
 
2008-06-11 17:46:08

 

왜  공동체 자유주의인가?   
- 회의론(懷疑論)에 대한 답변 -
     
                                                 

                                                                        박  세  일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의 이념은 공동체자유주의(communitarian liberalism)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자유주의란 국가조직 내지 운영원리로서 그리고 국가정책의 결정원리로서 개인의 존엄과 자유의 확대를 기본으로 하되 공동체의 건강 내지 발전과의 조화에도 노력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환언하면 자유주의를 기본으로 하되 공동체주의에 의한 보완과 보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공동체는 사회공동체(가족과 이웃)와 역사공동체, 그리고 자연공동체 등을 의미한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개인적 존엄과 자유의 확대가 역사발전과 진보의 기본 원리이었다.  따라서 이를 확실하게 보장하고 확대하는 자유주의의 실현이 국가발전과 국민통합의 제 1과제가 된다. 그러나 개인적 자유만 과도하게 주장되면 사회?경제적 격차와 대립의 증대, 인간소외와 개인의 파편화, 공동체연대의 약화, 역사단절과 전통붕괴, 생태파괴와 생명훼손 등 사회?역사 ?자연공동체 등이 피폐하여지고 나아가 파괴되어 자유주의의 지속자체가 어렵게 되는 상황이 온다. 따라서 국가발전과 국민통합의 제2의 과제로 공동체의 가치와 연대를 중시하는 공동체주의가 필요하게 된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극단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가져오는 각종의 부작용, 즉 사회경제적 격차의 증대, 공동체연대의 약화, 공동선의 파괴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 내지 집단주의에 의지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역사는 전체주의 내지 집단주의가 과도한 자유주의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냉엄하게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올바른 답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기본으로 하면서 공동체 구성원간의 상호설득과 자기교육을 통하여 개개인의 공동체의식과 책임을 제고하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공동체자유주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공동체자유주의여야 오늘날 지역과 세대, 그리고 이념과 계층으로 분열하고 갈등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국민들을 하나로 통일하고 결집시켜 낼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많은 갈등이 자유와 평등의 갈등이고 개인과 전체 간이 대립이다. 그런데 공동체자유주의는 이러한 갈등과 대립하는 가치 사이에 올바른 우선순위를 정하고 서로 조화시킬 수 있는 원리를 제공할 수 있다. 구체적 공동체자유주의는 자유와 개인을 기본가치로 하고 평등과 전체를 보완가치로 한다. 그래서 극단적 자유와 극단적 평등으로 갈등하는 우리사회를 통합할 수 있다.

 

 또한 공동체자유주의여야 대한민국을 21세기 세계 일류국가인 선진국으로 만든다는 선진화라는 국가목표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2~3백년간의 인류의 발전도 그러했지만 21세기의 발전은 더욱 많은 자유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21세기에는 발전과 더불어 각종 공동체의 위기가 심화되는 시기가 될 것이다. 가족 해체, 지역공동체의 약화, 학교공동체의 표류, 직장공동체의 붕괴, 역사와 전통공동체의 해체, 환경과 생태공동체의 파괴 등이 심해질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공동체의 위기를 적극 치유하면서 자유주의의 기본원리를 더욱 강력하게 지켜 자유의 심화와 확산에 노력하여야 우리나라는 선진국진입에 성공할 수 있다. 결국 공동체자유주의여야 대한민국의 선진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자유주의를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 학계의 일각에선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는 본래가 이론적으로 서로 상충하고 모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과 비판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공동체자유주의라는 주장에 대하여 선뜻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어떻게 서로 대립하고 모순하는 두 가지 생각, 즉 공동체와 자유를, 하나의 주장으로 묶을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하고 비판한다. 이러한 회의론과 비판론은 과연 옳은 주장인가? 이러한 회의론 내지 비판론이 나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우선 그 이유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공동체자유주의의 주장과 그 내용도 보다 확실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우리가 공동체자유주의를 주장하는지도 보다 명확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회의나 비판론을 보면 대체로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첫째,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를 집단주의(collectivism)와 명확히 구별하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공동체주의를 개인주의에 대립하는 집단주의의 하나로 혹은 아류로 혼동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주지하듯이 자유주의는 개인을 기본적 가치로 중시하고 기본으로 하는데 집단주의는 개인의 가치보다는 집단의 가치 내지 집단의 이익을 앞세운다. 따라서 자유주의와 집단주의는 원리적으로 서로 대립하고 상충한다. 그러니 공동체주의를 집단주의와 같은 것으로, 혹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면 당연 공동체자유주의는 집단주의적 자유주의라는 말과 같이 해석되어 형용모순(形容矛盾)이 된다. 성립할 수 없는 말이 된다.  

 

 그런데 사실 공동체주의와 집단주의는 본래 크게 서로 다른 것이다. 집단주의는 집단의 가치를 앞세워 개인의 가치와 대립하지만 공동체주의는 개인의 가치를 기본으로 한다. 다만 공동체주의는 개인의 가치를 절대화하지 않을 뿐이다. 개인의 가치 내지 자유를 가장 중요한 기본가치로 인정하고 이를 존중하나, 공동체의 소중함도 함께 중요시하자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공동체가 피폐하여지면 개인의 자유와 가치도 존중받기 어렵고 지켜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공동체주의는 공동체의 소중함을 주장하면서도 그 방식이 권위주의적이거나 강제적이지 않고 개개인의 양식과 이성에 호소한다. 따라서 공동체의식의 제고를 위한 대화와 설득과 교육이 주 방식이다. 

 

 개인을 억압하고 개인과 대립하는 것이 집단주의라면 개인을 존중하고 개인을 설득하는 것이 공동체주의이다. 따라서 공동체주의에서의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자유공동체(liberal community)이다. 개인의 자유를 전제로 한 공동체주의이다. 자유를 전제로 공동체의 소중함을 설득하고 호소하는 공동체주의이다.  


  집단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차이는 구체적인 예를 생각하면 보다 명확해진다. 예컨대 집단주의의 대표적 예로는 계급주의 정당을 들 수 있다. 계급주의에서는 계급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한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와 가치는 계급의 이익과 승리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고, 때로는 그 개인의 희생이 집단적으로 강요되고 강제된다. 이러한 집단주의는 물론 개인주의?자유주의와 상극의 관계가 된다. 
 

 

 반면에 공동체주의의 대표적 예로 가족공동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족공동체의 경우는 가족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존엄)와 자유가 존중된다. 그러면서도 모든 구성원들이 가족공동체의 공동선(共同善) (모두의 이익)을 위하여 서로 협력하고 노력할 것이 강조되고 요구된다. 구성원들에게 각자의 발전을 위한 노력과 더불어 공동체를 위한 기여와 책임이 요구되지만 그 요구의 방식은 기본적으로 연장자에 의한 솔선수범, 가족 구성원들간의 대화와 설득, 상호교육과 자기수양 등이 된다. 결국 구성원 각자의 양심과 양식에 의지하여 공동체적 연대가 강화되는 셈이다.  

 

 이와 같이 공동체주의와 집단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견해는 옳지 않다. 오히려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존하여야 지속가능하고 발전하는 자유공동체를 만들 수 있게 된다.   


  공동체자유주의에 대하여 회의론 내지 비판론이 나오는 두 번째 이유는 정치이론(Political Theory)과 철학이론(Philosophical Theory)의 구별을 확실히 하지 아니했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정치적 자유주의(Political Liberalism 혹은 Liberalism as Political Theory)와 철학적 자유주의(Philosophical Liberalism), 그리고 정치적 공동체주의(Political Communitarianism 혹은 Communitarianism as Political Theory)와 철학적 공동체주의(Philosophical Communitarianism)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공동체자유주의에 대한 오해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서구사상의 전통에서 보면 철학적 자유주의와 철학적 공동체주의는 상호모순하고 대립한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공동체주의는 상호모순하지 않고 오히려 상호보완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공동체자유주의에 대하여 회의론 내지 비판론을 제기하는 학자들은 대부분이 자유주의를 철학적 자유주의로, 공동체주의를 철학적 공동체주의로 이해하고 이 둘이 어떻게 하나로 합쳐질 수 있는가 하는 회의를 가지는 듯하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회의 내지 비판이다. 이들 철학자들에게는 공동체주의나 자유주의를 이야기하면 곧 1980년, 1990년대 구미(歐美) 철학 계에서의 큰 논쟁의 하나였던 공동체주의자(사실은 철학적 공동체주의자)인 샌델(M. Sandel), 매킨타이어(A. Maclntyre), 테일러(C. Taylor), 왈쩌(M. Walzer) 등의 자유주의(사실은 철학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롤스(J. Ralws)의 반론 등이 쉽게 상기되기 때문이다.  

 

   분명히 철학적 자유주의와 철학적 공동체주의는 상호 모순 대립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 인식론적 입장을 다루는 철학적 자유주의는 인간의 개체성을 중시하고 인간을 자기완료적 존재 내지 자기충족적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 내지 공동체는 자유스러운 자기완료적 인간의 자발적 결단으로 즉 일종의 사회계약의 결과로 본다. 반면에 철학적 공동체주의는 사회나 공동체를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선택, 즉 사회계약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 자체의 본성 속에 공동체성이 있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한다. 인간을 비연고적(非緣故的) 자아(unencumbered self), 원자화(原子化)된 개체(atomistic view of self)로 보지 않고 형성적(形成的) 관계적(關係的) 자아(constituted and situated self)로 본다. 이렇게 철학적 자유주의와 철학적 공동체주의는 인간의 자아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따라서 철학이론으로서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은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공동체자유주의는 개체성과 사회성의 대립을 전제한 철학이론이 아니다. 정치사상으로서의 공동체자유주의이다. 정치사상으로서의 공동체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정치사상으로서의 자유주의)와 정치적 공동체주의(정치사상으로서의 공동체주의)의 결합이다. 이 두 주장의 결합이 어떻게 가능하고 더 나아가 왜 바람직한지를 각각 나누어 살펴보도록 한다. 

 

  우선 정치사상으로서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요한 정치적 가치로 본다. 그래서 국가나 정치의 존재이유는 특히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의 보호하고 확대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반드시 철학적 자유주의를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관계적 존재라고 보는 철학적 공동체주의 입장을 취한다하여도 개인의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자유주의 입장을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다. 요컨대 철학적 이론과 정치적 이론은 직접적 인과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정치사상으로서의 공동체주의는 철학적 이유 때문에 철학적 자유주의에 대립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이 아니다. 정치적 공동체주의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들로서 에치오니(A. Etizioni), 푸트남(R. Putnam), 벨라(B. Bellah), 바버(B. Barber)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철학적 담론 보다는 현실의 정치 ? 경제 ? 교육 ? 가족 문제 등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현대사회가 극단적 이기적 자유주의 사회로 가면서 발생하는 각종 공동체의 피폐, 공동선의 파괴문제를 보면서 이들 문제를  크게 광정(匡正)하기 위하여 정치적 공동체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개개인의 공동선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과 공동체의 가치와 연대를 소중히 하는 자발적 노력을 강조한다. 그래서 과도한 이기적 자유주의가 가져오는 공동체 해체의 문제를 극복하려 한다. 가정파괴, 학교붕괴, 범죄증가, 인간소외, 환경파괴 등의 현대 자유사회의 각종 문제를 가능한 공동체적 가치와 연대를 강조하고 이를 설득, 교육함으로써 공동체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자각에 기초한 자발적 ? 자구적 노력으로 풀려고 한다. 이러한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자유사회가 지속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의미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공동체주의는 결코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 자유주의를 강화하고 완성시키는 노력의 하나로, 혹은 보다 양질의 정치적 자유주의로 가는 노력의 하나로 우리는 정치적 공동체주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정치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공동체주의는 무리 없이 공동체자유주의로 통합될 수 있고, 아니 그렇게 통합되는 것이 21세기적 상황에서 보다 바람직하고 자연스럽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솔직히 철학적 자유주의와 철학적 공동체주의는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그렇게 매력이 있는 주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동양철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개체와 전체는 불이(不二)라는 입장을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 ? 불교 ? 도교의 입장에서 보면 개개인을 떠난 공동체도 따로 존재할 수 없고, 공동체적 관계를 떠난 독립된 개체도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개체와 공동체는 존재론적으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서로 완전 하나라는 주장도 아니다(불이이불일: 不二而不一). 이러한 동양철학적 입장에서 보면 지난 세기 말에 있었던 구미에서의 철학적 자유주의와 철학적 공동체주의간의 논쟁은 그다지 흥미 있는 주제는 아니다. 구미철학계가 아직 데카르트(Descartes)의 이원론(二元論)의 덫을 벗어나지 못한 증거에 불과하다고 본다.   

 

 여하튼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공동체적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공동체주의의 결합으로 이해해야 하고, 그렇게 하면 양자 간에는 아무런 모순도 대립도 없고 오히려 상호보완적 ? 상호보강적 관계가 된다. 그래서 공동체자유주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즉 개개인의 자유보호와 확대를 기본목표로 하되, 설득과 교육을 통하여 공동선에 대한 이해도 함께 높여 개체와 공동체의 동시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 즉 공동체 자유주의적 주장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21세기 초 대한민국의 국민통합과 선진화를 향한 국가발전의 기본철학과 이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지난 6월 5일에 발간된 '공동체자유주의: 이념과 정책'에서 발췌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목록  
번호
제목
날짜
385 [홍사종] ‘얼리버드’만 새냐 08-06-12
384 [박영범] 최저임금 인상, 低賃근로자 고용 피해없게 08-06-12
383 [김형준]‘국민 성공,정부 실패’의 역설 08-06-12
382 [유호열] 6·15 선언의 현재적 의미 08-06-12
381 [유호열] ‘6·15 선언’과 남북의 현실 08-06-12
380 [김영봉] 멈춰선 세계화 시계 08-06-12
379 왜 공동체자유주의인가- 회의론에 대한 답변 08-06-11
378 [노부호] 한국의 비전과 정부의 역할 08-06-10
377 [이인실] 투자 진작에 올인하라 08-06-03
376 [이각범] 콘텐츠산업 육성의 지름길 08-06-03
375 [박태우] 너무도 안타까운 흐름들 아직도 모순으로 가득 찬 지구공동체 08-06-02
374 [박윤배] 한국의 흐름은 무엇인가? 08-06-02
373 [이홍규] 선진화에 영혼을 불어넣어야 08-05-26
372 [김형준] 17대 국회, 불명예 씻고 끝내라 08-05-26
371 [강경근] 실용정부 성공 열쇠는? 08-05-26
370 [정성훈] 지주공기업 설립 무엇이 문제인가? 08-05-23
369 [선한승] 중국진출기업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08-05-23
368 [박태우] 이산이 정약용을 만나다 08-05-22
367 [강석훈] '내리막 경제'대처법 08-05-21
366 [이인실] 기업이 사업 전념할 수 있도록 08-05-21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