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러시아 문호인 도스토옙스키가 21세기의 일본에서 다시 태어났다. 동경외국어대 카메야마 이쿠오(龜山郁夫·59) 학장이 새롭게 번역한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통해서다. 이 책의 전 5권은 70만부 넘게 일본 전역으로 팔려나갔다. 그렇게 히트한 첫 번째 이유는 찬찬하게 음미하면서 나온 그 번역의 맛깔스러움에 있다고 한다. 한 시간에 원고지 두 장을 넘지 않았으며 그런 속도로 하루 5시간 정도의 번역시간을 지켰다. 곱씹으면서 삭히는 번역을 위한 여건을 스스로 마련한 것이다.
그런 자기억제가 독자의 이해를 돕는 지적 결과물을 낳았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독자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의식 과잉의 남성 세계를 그린 이 저작물이 의외로 현대 일본 여성들의 친근감을 불러일으켰다. ‘의식 과잉이라….’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류의 현대적 의식의 경쾌한 흐름을 즐겨 읽는 우리 젊은 여성들과 비교하면서 논리를 비약한다면, 그만큼 한국 남성들은 일본의 경우보다 더 무거운 의식의 과잉 속에서 살아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런 과잉의 의식은 주로 정치에 집중되었다. 우리 사회 각 분야의 내로라 하는 인재들이 마치 연어가 회귀하듯 정치의 진원지로 들어가려고 기를 쓰는 현상이 이를 말한다. 그 결과 국가와 사회라는 공적인 공간에서의 정치적 삶이 우리들 자신의 사적 공간을 최소화하면서 운신의 폭을 한층 좁아지게 만들었다.
1960년 4월19일 21명의 사망자를 낸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 발포로 시작된 186명의 인명 살상은 이승만 정권 붕괴의 신호탄이었음과 동시에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세운 그 기적을 신화로 만들면서 동시대인들의 정치의식 과잉의 운명을 정한 둠즈데이(doomsday)였다. 1980년 광주의 5월18일은 이를 더욱 짙게 한다.
건국과 호국, 그리고 산업화 세력의 그 기적과도 같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이루려는 그 성취의 시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온 정치권력의 오만은 결국 짧게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10년, 길게는 김영삼 정부를 포함한 15년의 세월, 대한민국을 건국하여 지키고 발전시킨 세력에 대한 비난을 넘어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노무현 정권에서 극대화된 국가보안법 폐지의 시도, 과거사법 제정, 언론법 개정, 사학법 개정 등은 이를 생생히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새 정부는 실용을 표방한다. 전봇대 뽑기가 이를 상징한다. 그 실용이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나 ‘상실의 시대’류의 사회이탈적 자기의식에의 침잠에 치우치지 않고 그래도 역시 ‘카라마조프의 형제’와 같은 사회대향(對向)적 의식에 기초하는 것이었으면 한다. 지난번 전봇대는 잘 뽑은 것이다. 하지만 마땅한 인도가 없는 주택가 도로에서의 전봇대는 일정하게 인도를 만들어 주는 기능도 있었다. 전봇대 안쪽으로 길을 걷는 사람은 뒤쪽에서 오는 차를 의식하지 않고 안심하게 걸을 수 있다.
총선거로 제18대 국회가 구성된다. 새로운 정치의 지형이다. 이명박 정부의 실용은 좌로부터 방향을 전환하여 곧장 우로 가는 것보다는 도스토옙스키도 알고 무라카미도 이해하는 성숙함이 되어야 한다. 우리 헌법 전문에서 말하는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수 있는 헌법적 가치의 지향이 그것이다. 과거 10년 입법에 대한 개폐작업은 찬찬하게 음미하고 곱씹으면서 삭히는 그런 자기억제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카메야마가 지켰던 것처럼 ‘한 시간에 원고지 두 장을 넘지 않는 그런 속도로….’ 보다 많은 사람이 새 정부의 ‘작품’을 친근하게 완상할 수 있도록 말이다.
♤ 이 글은 2008년 4월 20일 세계일보 [칼럼]에 실린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