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 텔레비전의 방종과 오만이 도를 넘었다. 거칠 것 없는 선정성과 폭력성은 표현의 자유를 넘어 표현의 방종이다. 조악하고 저질스러운 프로그램을 강권하는 채널 편성은 시청자의 권리를 무시하는 오만이다. 전문적 내용으로 공중파의 대안이 되며, 원하는 것을 골라 보는 프로그램 선택의 시대를 열 것이란 기대는 사라지고 있다. 공중파 텔레비전은 '거대한 황무지'라 비판받았다. 케이블 방송은 '숨 막히게 하는 오수(汚水)'로 낙인찍히고 있다.
케이블 방송의 매력은 프로그램의 전문성과 채널의 다양성이었다. 시청자들은 백화점 같은 공중파 텔레비전보다는 전문 쇼핑몰인 케이블 방송에서 훨씬 자유롭고 알차게 프로그램 쇼핑을 즐길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은 케이블 텔레비전의 본질적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역설적이게도 한국의 케이블 방송에서 실종된 것은 바로 전문성이다. 뉴스나 스포츠, 교육 등 몇 개를 제외하면 수많은 '전문채널'에서 정작 전문 프로그램은 찾기 힘들다. 채널 이름에 걸맞은 자체 제작은 별로 없다. 방송사들은 공중파 연예·오락 프로그램 등을 재탕, 삼탕한다. 그것도 모자라 외국의 낡아빠진 프로그램까지 동원한다. 아니면 조잡한 광고로 무한정 시간을 때운다.
한국의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가장 성공한 전문성이 하나 있다면 에로물일 것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10~20년 전의 성인영화까지 틀어대던 영화전문 채널들은 이제 직접 제작에 나서 섹스의 전문성을 한껏 드높이는 실정에 이르렀다. 논란의 핵심은 선정성과 폭력성이다. 가족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성인영화의 범람은 텔레비전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게 만든다.
시청자들은 프로그램 제작·공급자들의 몰상식과 무성의에 분노한다. 분노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은 채널을 제공하는 종합유선방송사업자들의 몰염치와 횡포이다. 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시청자들이 주로 보는 채널은 평균 7~8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역유선방송사업자들은 기본적으로 40~50개에서 수백 개의 채널까지 편성한다. 시청자들은 이 같은 '패키지' 때문에 원하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 채널의 수신료까지 부담해야 한다. 부모들은 섹스와 폭력이 얼룩진 프로그램을 아이들이 볼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경제적 부담을 감수해야 하니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사업자들은 채널을 막으라고만 하지 막힌 것의 요금은 돌려주지 않는다.
사업자들은 회사의 선전을 아무 프로그램에나 자막으로 내보내 시청을 방해하기 일쑤다. 이들은 시청률 높은 공중파 채널 사이에 홈쇼핑을 끼워 넣어 소비심리를 부추긴다. 시도 때도 없이 채널 편성을 바꿔 시청자들을 혼란케 한다. 모두 인기 번호를 차지하기 위한 방송사들의 로비 때문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시청자들은 직접 돈을 내고 있는 프로그램에 대해 어떤 통제권도 행사할 수 없다.
1948년 케이블 텔레비전의 탄생 이후 수십 년간 미국 정부는 간섭과 통제를 별로 하지 않았다. 신문의 절대적 자유를 선언했던 연방대법원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들은 공중파와는 달리 전파 스펙트럼을 사용하지 않는 케이블 텔레비전을 신문처럼 여겼다. 하지만 봇물처럼 쏟아지는 시청자들의 불만과 민원에 정부는 1992년부터 본격적인 규제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제 연방방송통신위원회(FCC)는 시청자들이 선택한 프로그램에 대한 수신료만 내는 '일품요금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도 도입할 가치가 있는 제도이다.
1961년 당시 FCC위원장이던 뉴턴 미노는 "텔레비전이 착할 때는 신문이나 영화, 그 어떤 것도 그보다 더 착할 수 없다. 그러나 나쁠 때는 그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고 말했다. 표현의 자유를 오·남용하는 방종은 타율적 통제를 불러들인다. 한국의 케이블 텔레비전도 정부나 국민들이 사정없는 매를 들기 전에 정신 차려야 한다.
♤ 이 글은 2008년 4월 7일 조선일보 [사설·컬럼]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