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물가를 잊고 살았다. 최근 수년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3%에 머물렀다. 2006년에 2.3%, 지난해 9월까지도 2.3%였던 소비자물가가 10월에 3%로 올라서더니 올 2월에는 3.6%로 껑충 뛰었다. 소비자물가를 조사하는 대상 품목 총 489개 중 지난 두 달간 작년 12월 대비 물가 상승률이 두 배나 되는 품목이 92개에 달했다. 특히 기초생활과 직결된 식료품비와 유류비 등이 급등해 서민과 영세 상공인들의 생활의 주름살이 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저물가 고성장의 ‘골디락스(Goldilocks)’에 안주해온 우리 경제로서는 당황스럽기조차 하다. 과거의 인플레이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게 아닌지 위기감이 감돈다.
당연히 정부가 칼을 빼 들었다. 서민생활에 직결된 52개 품목을 골라 10일 단위로 물가 동향을 점검하고 많이 오른 품목은 직접 관리하겠다고 한다. 여기에다 할당관세 적용, 유통구조 개선, 시장경쟁 촉진, 비축물자 방출 등 정책 수단을 총동원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쳤다. 정부의 총력 태세는 긴급할당관세를 당장 4월 1일부터 낮춘다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총 세수 효과가 재정부 추산으로 1조9000억원에 이를 정도로 매우 ‘값비싼’ 대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과연 물가가 잡힐까? 정부는 82개 품목에 대한 긴급할당관세 적용으로 소비자물가를 0.1%, 수입물가를 0.27% 낮출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물가를 안정시키려면 왜 물가가 올랐는지부터 정확하게 진단해야 한다. 사실, 그간의 물가안정은 이례적인 세계 경제환경 덕이라고 여겨진다. 세계화의 진전으로 제품시장의 경쟁이 격화돼 기업의 가격 인상 여력이 축소되었고, 무엇보다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중국이 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저가 수출품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보통신제품 산업의 생산성 향상과 정보기술(IT) 제품의 급속한 가격 하락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러한 상황이 급반전되고 있다. 중국 등 신흥국가들이 원자재의 블랙홀로 떠올라 국제 원자재 가격이 치솟고 있다. 중국 경기가 과열되면서 임금도 빠르게 오르고 있다. 중국보다 더 싼 대체 수입원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의 비용 상승은 각국의 수입 물가에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IT기술 혁신에 따른 생산성 향상 효과도 줄고, 이를 웃도는 수준의 임금 상승률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적으로 축적된 과잉 유동성이 수요 측면에서의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있다. 최근에는 급격한 경기침체라는 벽에 부딪히면서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 고물가 현상)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물가안정을 강조하는 정부의 정책기조는 일단 옳은 방향으로 보인다. 문제는 뾰족한 수단이 없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지시로 물가 잡기에 나서긴 했지만, 이번 52개 품목 중 9개의 공공요금을 제외한다면 가격을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 그런 만큼 정부의 지나친 물가안정 의지는 자칫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당장 형편이 나은 대형 마트들은 정부 시책에 부응해 생필품값을 내리는 시늉을 하고 있지만, 그런 여력이 없는 중소 유통업체는 이번 가격 통제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크다.
더욱 큰 문제는 다른 거시정책과의 조화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이 금리에 대해 상반된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지금 시장이 혼란스럽다. 오락가락하는 당국의 물가안정 대책으로 환율시장과 채권시장이 요동치는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물가안정은 환영할 만한 일이나 서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물가 관리에서 보여준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일자리 창출과 경기 진작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불안한 물가보다 더 걱정되는 것이 불안한 경기다.
♤ 이 글은 2008년 3월 28일자 세계일보 [경제비평]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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