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03 11:35:03
선진화의 이론적 토대 구축해야
이홍구 한반도선진화재단 고문 / 前 국무총리
선진화 원년’을 선포한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는 의욕적이며 감동적이었다. 이념의 시대를 넘어 실용의 시대로 나아가자는 호소도 넓은 국민적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데올로기 시대의 교조적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유연한 실용을 국가 운영의 기본 원칙으로 삼겠다는 것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적절한 판단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념보다는 실용을 더 강조한 나머지 실천에 대한 열의와 박력만을 앞세워 국가발전 전략의 초석이 되는 이론적 기초의 중요성이 흐려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념 과잉에 못지않게 이론의 결핍도 선진화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국정에 참여한 대학교수의 수가 많다 해도 그 자체만 가지고 국가 기본전략에 대한 지성적 판단과 이론적 대화가 자동적으로 보장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우선 ‘선진화’란 과연 어디서부터 출발해 어디로 가겠으며 또 어떤 길로 어떻게 가겠다는 것인지. 이에 대한 대답은 일견 자명한 것 같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간단치 않음을 알게 된다. 모든 역사의 흐름이나 발전 과정에 적용되는 일반 원칙은 차치하고, 개별 국가가 처한 특수여건이나 발전단계를 정확히 진단하고 적절한 발전 전략을 처방하는 것은 고도의 이론적 작업을 토대로 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현대정치사에서 모든 국가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예외 없이 경제성장과 분배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난제에 시달려 왔다. 이에 더해 그 과제를 처리하는 주체로서의 정치체제와 리더십의 성격이 발전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성장·분배·체제라는 세 변수에 의한 일종의 3차방정식이 성립되는데, 이는 수학에서의 풀이와 같이 일반적 공식에 대입할 수 없으며 그 해답은 개별 국가의 특수사정과 발전 단계, 리더십 및 체제의 성격을 감안한 고도의 이론적 작업에 의해서만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에서 추진하고자 하는 선진화도 결국 새로운 성장 동력과 보다 공정한 분배를 민주제도에 의해 선출된 이명박 정부가 어떻게 균형 있게 추진하겠는가 하는 시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선진화는 21세기 초 세계사의 전개 과정에서 새롭게 시도되는 국가발전의 실험일 가능성이 크며 따라서 누구를 모방하거나 벤치마킹하기에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남다른 독창성이 요구되며 더불어 견실한 이론적 토대의 구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바라고 꿈꾸며 선택하는 선진공동체의 청사진은 폐쇄된 민족주의의 표출이 아니라 개방된 국제사회에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한국인의 집단적 창의력이 결집된 창작품이 돼야 한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빠른 속도로 성취했고 그 흥분 속에서 선진화의 문턱을 쉽게 넘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가졌다가 외환위기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고 큰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온 국민의 희생과 노력으로 어려운 고비는 넘겼지만 선진화의 길을 찾아 헤매며 무모하게 전진하는 결과가 결국 큰 국가적 재앙으로 이어진다는 것만을 실감하게 됐다. 바로 지금도 우리는 그러한 위기상황에 빠져 있다. 대통령이 지적했듯이 세계는 우리를 저만치 앞질러 가고 후발국들도 바짝 추격해 오고 있으며 국가경쟁력은 떨어지고 중산층이 위축되며 서민생활이 어려워져 계층 간, 집단 간의 심각한 갈등이 노출되는 가운데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준법정신마저 크게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건국 60년을 맞는 이 시점에서도 조국통일의 전망은 묘연하고 산정조차 하기 힘든 통일비용을 어떻게 선진화의 장기적 계정에 포함시킬지 그 또한 언젠가는 넘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진화 원년을 선포한다는 것은 단순한 위기관리를 넘어 새롭고 획기적인 발전 전략을 과감히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 하겠다. 성장, 분배, 민주주의란 세 마리 토끼를 단번에 잡아 선진국 대열에 자리 잡으려면 국민 모두가 납득하고 동참할 수 있는 새로운 발전의 로드맵과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토대가 먼저 제시돼야 할 것이다. 그동안 발표된 선진화에 대한 연구업적이나 각계의 제언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발전시키는 성의와 자세를 새 정부에 기대하게 된다.
♤ 이 글은 2008년 3월 2일자 중앙일보 [오피니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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