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2-18 09:36:10
정부 만능주의가 부른 ‘문화재 테러’
이인실(한반도선진화재단 경제정책연구소장·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국보 1호를 잿더미로 만든 숭례문 방화사건은 정부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되었다. 사건을 일으킨 채모씨는 문화재가 국가를 대신한다고 생각해 정부에 대한 반감의 표적으로 숭례문을 택한 것 같다. 정부에 억울함을 여러 차례 진정했으나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이 등을 고려해 집행유예로 선처를 해준 법원에 대해서까지 정부가 할 일을 제대로 못했다고 심한 반감을 표시했다. 국가에 대한 절망감이 국가에 대한 증오를 불렀다.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해 반국가적 인격 장애라는 어려운 병명을 대거나 노인의 정신병적 소행, 사회심리적인 문제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필자는 이 사건을 보고 1995년 4월 19일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발생한 연방정부 빌딩 폭파사건을 떠올렸다. 극우파인 티모시 멕베이라는 청년이 미국 정부에 불만을 품고 미국 남서부 오클라호마시 연방청사 건물을 폭파시켜서 탁아소에 있던 어린이를 비롯한 169명이 사망하고 400여명이 부상했다. 이 끔찍한 사건은 정부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도를 저하시킨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철저히 붕괴되었음을 온 국민이 느끼게 된 것이다.
이 폭탄 테러의 충격은 정부의 역할에 대한 뜨거운 논란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미국인들은 정부에 대해 비판을 하더라도 건설적인 비판을 해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정부의 역할에 대한 회의가 커지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가 하버드대와 공동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1960년대만 해도 미국 시민들은 연방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 4분의 3 정도가 옳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997년 한 여론조사에서는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연방정부는 22%까지 떨어졌다. 이러한 정부 신뢰가 저하된 데에는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커진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에 민간이 제공하는 인적·물적 자원의 크기와도 연관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만 해도 미국 연방정부의 지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3%에도 못 미쳤다. 그러던 것이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7년에는 GDP의 18%로 커졌고 최근에는 36%에 이르게 되었다. 이 수치는 프랑스와 같이 50%를 넘는 나라보다는 낮은 수치이지만 선진국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작은 정부라고 하는 미국도 정부의 역할이 엄청나게 팽창했음을 알 수 있다.
참여정부 들어 공무원 수가 6만명이나 늘었지만 아직도 작은 정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선진국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작은 정부, 큰 정부 논란이 더욱 뜨겁다. 나라마다 경제발전 정도가 다른데 시대적 흐름은 감안하지 않고 국가 간 수평적 비교로 작은 정부, 큰 정부를 논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이번 숭례문 방화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다양하다. 일각에서는 노인범죄가 늘고 있고 이는 국가에 대한 절망 때문이니 ‘절망 관리시스템’을 정부가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제 역할을 못해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 국가가 국민의 인권을 유린해도 정부를 이토록 증오하는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땅값을 제대로 쳐주지 않는 건설회사에 대해 정부가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정부를 상대로 테러를 한 것이다. 한 정신 나간 사람의 일로 치부하기엔 많은 시대적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70년을 살아오면서 범죄라고는 향토예비군법 위반으로 벌금 5000원을 받은 게 전부인 채씨가 정부를 증오하게 된 것은 정부에 대한 기대가 큰 탓도 있다. 갑자기 늘어난 정부의 규모만큼 커져버린 정부 만능주의가 부른 참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이 글은 2008년 2월 18일자 세계일보 [시론]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