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한 편 보았고, 문화예술계 원로들을 만나 덕담을 나누었다. 대통령 당선자의 일정과 해야 할 일을 감안하면 상당한 '배려' 같기는 하다. 그러나 문화예술계의 궁금증은 여전하다. 새 정부의 문화정책 방향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이념적 성향이 강했던 특정단체나 인물들이 주도했던 시절의 문화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모호해 보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문화의 중요성에 대해서 주목했고, '문화의 시대'를 십분 활용했다고 할 만하다. 이전의 정부에서는 문화를 적당한 구색으로 보거나 실체가 빈약한 장식으로 여기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에서는 문화를 통해 정권의 이미지를 포장하려 했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사회 변혁을 추동하는 창구이자 수단으로 문화를 활용했다. 결과적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문화와 예술은 우아한 향기로 치장한 무기처럼 우리 사회 각 분야를 할퀴고 찢었다. 문화와 예술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을 때 어떤 결과를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실증의 과정이었다.
이전의 정부가 문화, 예술 정책에 전략적 집중을 했던 데 비해 그에 대한 한나라당의 대응은 중심을 잡지 못했다. 문화예술계는 물론 교육, 노동, 사회 각 분야에서 문화를 매개로 한 전략적 개편과 개조작업이 진행되는데도, 확실한 입장과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 채 해당 분야와 관련 있는 의원들의 개별적 대응 수준에 그쳤다. 그 과정에서 문제를 바로잡기보다 오히려 동조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문화와 예술은 지원하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며 정치나 경제 분야에 비해 덜 급하고 더 소프트한 대상으로 인식하는 사이, 우리 사회는 건국 이후 가장 심각한 이념적 혼란을 경험했고 나라의 정체성까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앞으로의 문제도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의 이념적 지향이 틀렸든 그렇지 않든 문화예술 분야의 코드 인맥과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넓고 깊게 퍼졌다. 그들이 치중했던 인력 배치와 이념 지향의 교육 사업은 각 분야에서 뿌리를 내렸고, 법과 제도를 방패 삼아 영향력을 지탱하려는 시도도 완강하다.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개인 수준의 활동 문제가 아니라 제도적 고착화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새 정부가 추진하려는 운하건설이나 경제발전 같은 문제들도 문화적 가치로 여과되면서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상황에서 새로운 정부를 이끌어갈 지도자의 명확한 인식과 구상을 궁금해 하는 것은, 그를 통해 문화계 각 영역의 대응과 지형이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문화정책은 정치 지도자들의 개인적 취향이 얼마나 문화적인가라는 문제와는 다르다. 미술 전시회에 가고 영화를 보는 것은 관련 분야에 대한 상징적 지지나 격려가 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치열하다. 정부와 민간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나누며 균형을 이루는 문제, 지원을 한다면 그 대상과 규모, 우선순위와 방식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 등은 모두 문화적 인식과 불가분의 요소다.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문제로 귀결된다. 당장은 문화부 장관을 어떤 인물로 하느냐에 따라 새 정부의 문화적 인식과 지향이 드러날 것이다. 문화를 특정 목적을 위한 수단화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우아하게 보이면 그만'이라는 식의 무관심과 방치는 더 위험하다.
♤ 이 글은 2008년 2월 6일자 조선일보 [시론]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