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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잊을 수는 없지만 잊기로 하자
 
2008-01-02 09:43:33

잊을 수는 없지만 잊기로 하자


이홍구(한반도선진화재단 고문, 서울국제포럼 이사장)


‘잊을 수는 없지만 잊기로 하자’는 국민정서가 오늘의 스페인을 유럽의 중심 국가로 부상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바로 지금 우리의 경우가 잊을 수는 없지만 잊어서도 안 될 일이 수다한 상황으로, 우리의 미래와 꿈을 위해서는 지난날에 있었던 우여곡절은 잊어야 한다는 국민적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 것 같다.

 
보수주의·국수주의·마르크시즘·혁명적 진보주의 등 온갖 이데올로기가 뒤얽혀 싸웠던 70년 전의 스페인 내전은 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채 프랑코 독재에 의해 막을 내렸다. 그 독재체제는 1975년 프랑코의 사망을 계기로 평화적 체제 전환에 의해 민주화에 성공했고, 세계를 휩쓴 ‘민주화 제3의 물결’의 시발점이 되었다. 사실 우리의 민주화도 그 물결의 여세로부터 간접적으로 힘입은 바가 적지 않다. 오늘의 스페인은 마드리드 대 바르셀로나의 축구 시합에 온 국민이 취해 있을 만큼 태평성세를 누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스페인 국민들이라고 70년 전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와 그로 말미암은 깊은 상처를 모두 망각할 수만 있었겠는가. 위대한 조국 스페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지난날의 아픔과 쌓인 감정을 서로 용서하고 잊기로 선택한 국민적 정서가 정치적 타협으로 열매를 맺은 결과일 뿐이다.
 
우리는 유난히도 한(恨)을 많이 간직한 민족이다. 지난날의 아픔과 울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공동체 건설에 필요하다면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너그러운 감정으로 모두가 함께 꿈을 키워 가자는 국민적 선택이 요구되는 시점에 와 있다. 인간의 한계, 특히 우리의 이웃이 지닌 인간적 한계를 이해하고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서는 잊어야 하는 과거는 과감히 접고 잊기로 선택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밝은 미래를 어두웠던 과거사에 묶어 둘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과거를 모두 망각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역사의 교훈을 소홀히 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민족의 구체적 경험을 되새겨보는 역사의 재인식과 재창조의 과정을 통해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자율적 선택을 시도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함께 겪어 온 공동 경험은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멀리는 수천 년, 가까이는 20세기 전반 일제 강점기의 고난과 수모는 물론 해방과 분단의 소용돌이, 가난과 후진성에서 탈피하려는 산업화와 근대화를 위해 우리는 얼마나 힘든 시간과 땀을 함께 흘렸는가. 인간이 중심이 되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화를 성취시키려고 또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가. 그러나 이렇듯 건국·산업화·민주화를 성공시키며 얻은 높은 성취감에 비해 아직도 그런 성공의 대가(代價)에 대한 국민적 성찰은 미비한 채로 남아 있다. 우리의 국가적 성공의 그늘 속에서 과연 인권 보장과 공정한 배분이 이루어지는 사회정의가 얼마큼 실현됐느냐에 대한 우리 공동체의 집단적 성찰과 반성은 계속돼야 한다. 바로 그러한 성찰과 반성은 과거를 둘러싼 시비와 원망을 넘어선 관용과 융합의 기운이 충만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새해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가 함께 걸어온 지난 60년을 되돌아보면 밝은 영광의 날도, 어둡고 답답한 고난의 시기도 있었다. 이제는 차분한 마음으로 어둠보다는 밝은 빛을, 갈등보다는 조화를 찾아 나설 때다. 일견 양립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모순과 대결로 보이던 이념이나 규범도 포용적 국민정서 속에서는 화합을 위한 지혜로 융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선거나 여론조사마다 나타나는 국민정서가 바로 그러한 지혜를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 한국인만큼 국민 사이의 심한 격차를 안타까워하고 이를 시정하는 데 힘을 모으자는 민족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규격화된 처방이나 강요된 해결책, 그리고 급격한 변화를 매우 싫어하는 정치문화를 갖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미 국민의 마음속에는 서로 도와 가며 함께 잘살아 가는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자리 잡혀 가고 있다. 태안반도의 기름 유출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린 50만 자원봉사자가 그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잊을 수는 없지만 잊는 것이 공동체의 미래에 도움이 된다면 과감하게 잊기로 하겠다는 국민적 여유가 기대된다.
 
 
♤ 이 글은 2007년 12월 31일자 중앙일보 [이홍구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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