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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규] 자유언론의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2007-12-06 09:25:59

자유언론의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손태규(한반도선진화재단 언론정책팀장, 단국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포연 자욱한 전쟁터의 참호가 아니다. 두메산골의 초막도 아니다. 휘황찬란한 조명이 한껏 매력을 발산하는 서울 한복판에 촛불이 켜졌다. 종교 의식을 위해서가 아니다. 거리의 시위를 위해서도 아니다. 경찰청 출입기자들은 권력이 전기를 끊어버린 냉골의 기자실에서 기사를 쓰기 위해 촛불을 켰다.

 
야박한 주인이 전기요금이 밀린 셋방의 전기를 끊어버리는 행위는 1950~60년대의 서글픈 풍속도였다. 정부가 기자들을 거리로 내몰고, 그것도 모자라 기자실의 전기를 끊어버리는 야비하고도 치사한 짓이 세계 최고의 정보 대국,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월드컵 4강의 자부심이 가득 찬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러고도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언론 자유와 자유 언론이 존재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경찰 기자실은 기자들이 기자로서의 뼈대를 형성하는 곳이다. 젊은 기자들은 경찰 기자실을 근거지로 삼아 살인과 방화, 사기 등 각종 범죄와 사건을 취재한다. 그러면서 인간과 사회의 탐욕과 비극, 스산함과 고달픔을 배우고 기자가 되어 간다.
 
‘경찰기자’, 이른바 ‘사건기자’는 자유 언론의 출발점이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인권을 지키는 최전선의 파수꾼이다. 경찰 기자실은 그들의 보루이다. 단순히 기사를 송고하는 장소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일제와 군사독재시대를 거치며 경찰은 권력의 오만과 횡포를 상징하는 ‘완장’ 그 자체였다. 경찰서는 고문이 예사로 저질러지는 인권의 사각지대였으며 비리의 온상이었다. 지서나 파출소 앞만 지나가도 괜히 오금이 저린다는 국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경찰은 국민들이 공권력을 함부로 무시한다고 투덜댄다. 하지만 한국에서 경찰은 여전히 국민을 군림하는 존재이다.
 
경찰기자들의 할 일은 사건·사고를 취재하고 보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과거 경찰기자들은 경찰서에 출근하면 맨 먼저 보호실에 들러 “여기 억울하게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분 계십니까” 묻곤 했다. 인권은 물론 인간의 자존심마저 쉽게 무시하는 공권력의 현장에서 기자들은 거칠게 싸우다 두들겨 맞기까지 하면서 경찰의 오만과 횡포를 감시하고 저지해 왔다. 그러면서 기자들은 약자의 보호자, 공격받은 사람들의 방어자, 못 배운 사람들의 옹호자, 거짓과 부패에 회초리가 될 것을 다짐한다. 국민들은 기자들의 무례함과 타락에 분노하고 질책하기 일쑤다. 그러나 기자들의 정의감과 열정이 경찰에 억울하게 당하고 상처받은 국민들의 한을 풀어주는 데에 크게 공헌해 왔음을 인식해야 한다.
 
기자실 없애기를 지상 목표로 삼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경찰 기자실 폐쇄는 속 시원한 마무리가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경찰에서 기자실이 폐쇄되는 것은 비무장지대의 GP(감시초소)가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공권력의 부정부패와 횡포를 감시하고 저지할 최전방 초소가 사라지는 셈이다. 경찰 기자실 폐쇄가 외교통상부 등의 기자실이 폐쇄되는 것과 다른 의미를 갖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경찰 기자실의 존재 의미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정부는 기자실 문화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기자실을 폐쇄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가 기자실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기자실을 마치 악의 온상처럼 인식하고, 국민들에게 홍보하려면 명확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설사 기자실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정부가 제도를 만들어 기자들을 지도하고 관리하겠다는 것은 권위주의적 발상이다. 기자실 문화나 관행을 문제 삼아 기자실을 폐쇄한다면 뇌물을 사무실에서 받았다가 구속된 일부 경찰관이나 공무원 때문에 경찰서나 부처 전체를 폐쇄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머지 않아 경찰청 기자들은 기자실에서도 쫓겨날 것이다. 그들의 촛불도 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유 언론의 촛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그것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2007년 12월 6일자 조선일보 [시론] 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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