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04 20:49:22
‘농민을 위한 농민의 조직’ 농협이라고?
최양부(한반도선진화재단 농식품자원 연구소장, 전남대 초빙교수)
농협 임직원의 신분을 공무원에 준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닌가? 2007년 11월 30일, 대법원은 농협 임직원의 신분은 공무원에 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정대근 농협중앙회장의 구속으로 농협 임직원의 신분을 놓고 농협과 국가(검찰) 간에 벌어진 정체성에 대한 법적 다툼에서 대법원이 검찰의 손을 들어주면서, 정 회장에게 적용된 모든 법률과 법정구속이 정당한 것이라고 확정판결을 내린 것이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오늘의 우리 농협이 겪고 있는 자기상실의 정체성 위기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농협은 본질적으로 조합원 농민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자주적으로 결성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자조적인 단체라는 협동조합의 원칙에서 보면 이번 판결은 그러한 원칙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다. 사실 이 점 때문에 농협 임직원의 신분적 성격을 둘러싼 법적 다툼이 시작되었고 그래서 농협은 농민단체임을 들어 무죄를 주장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대법원은 농협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우리 대법원은 협동조합의 철학과 경영원칙을 몰라서 이런 판결을 내렸을까?
농민들의 자조적인 단체라는 농협의 본질적 성격상 농협의 임직원이 공무원일 수는 없다. 이치가 이렇게 자명한 데도 대법원이 이런 판결을 내린 것은 그러한 농협의 주장은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농협의 자기모순을 적시한 것이다. 농협이 농민을 위한 농민의 조직이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그렇지 않은 우리 농협의 현실을 뼈아프게 지적한 것이란 얘기다. 대법원은 농민들의 자주적이고 자조적인 단체라고 주장하는 농협에 대해 거짓말하지 말라고 질타한 셈이다.
더 이상 농민의 이름만 팔지 말고 진정으로 농민을 위해 일하는 단체라는 것을 몸으로 보이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것은 허위의식에 빠져있는 우리 농협의 현실을 적시하고, 정체성을 잃고 제자리가 어디인지 앞뒤 분간도 못하고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농협으로 하여금 제자리를 찾아 바로 서라고 경종을 울린 것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농협의 본질적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것으로 농협 임직원들에게는 치욕스러운 판결이 아닐 수 없다. 농협의 7만2000 임직원들은 2007년 11월 30일을 농협 치욕의 날로 기억해야 한다. 이 수모를 이겨내기 위해 이번 기회에 240만 농민 조합원과 역사 앞에 바로 서서 농협을 진정한 농민의 조직으로 만들겠다는 자기 뼈를 깎는 결의를 해야 한다.
1987년 우리사회의 민주화에 무임 승차해 농협의 민주화를 조합원을 위한 농협으로 혁신시키기보다는 임직원을 위한 조직으로 만드는 기회로 이용해온 잘못을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군림하는 농협에서 봉사하는 농협으로’ 자기 변혁의 고통을 이겨내야 하고, ‘조합은 조합원 농민에게, 중앙회는 지역/품목/업종농협에’ 주인을 찾아 되돌려 주어야 하고, ‘지역농협은 크고 강한, 중앙회는 작지만 효율적인 기구로’ 개혁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돈 장사 잘하는 농협에서 농산물 잘 팔아주는 장사 잘하는 농협으로’, 그리고 동네장사에서 벗어나 세계를 상대로 장사하는 글로벌 농협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농협은 이제 입으로만 농민을 위한 단체라고 떠들지 말고 정말 농민을 위해 일하는 농협임을 몸으로 보여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한편으론 농민의 단체임을 강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 위에 군림하고 있는 자기상실의 정신분열적 현상을 극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농협 임직원들은 이번 대법원 판결처럼 존재의미를 부정당하고, 공무원이 아닌데도 공무원과 같은 집단이라는 수모를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 이 글은 2007년 12월 4일자 조선일보 [시론]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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