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2일 오후 '2010년 우수 학교' 명패가 붙은 교문 안으로 보충수업 중인 학생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교문 앞엔 자녀를 데리러 온 학부모도 이따금 있었다. 130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만 타이베이의 라오쑹초등학교로, 겉으로 보기엔 보통 초등학교와 다를 바 없지만 학생 수 급감으로 시름이 깊은 곳이다. 한때 학생 수가 1만1,110명에 달해 '세계 최대 초등학교'였지만 지난해에는 465명까지 줄었다.
라오쑹초의 빈 교실은 대만의 '초저출생' 상황을 압축해 보여준다. 2025년 대만의 합계출산율은 0.695명으로 한국의 0.80명보다도 낮다. 전년도 0.885명보다도 크게 떨어졌다. 저출생 여파는 심각하다. 최근 몇 년간 신입생을 한 명도 받지 못하거나 아예 문을 닫고 통합되는 학교가 잇따라 나왔다. 대만 교육부는 2029년부터 전국 초등학생 수가 100만 명 아래로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주목할 점은 대만 아이들이 모든 지역에서 같은 속도로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7월 19~26일 한국일보가 대만 북부와 중부를 거쳐 남부까지 곳곳을 취재한 결과, TSMC를 비롯한 반도체 기업이 몰린 도시에서는 출산율 감소가 가파르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키울 경제적 여력이 반도체 산업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집중돼 있었던 탓이다.
"팍팍한 삶... 결혼·출산? 사치“
"식품과 생활필수품, 교통비는 계속 오르는데 임금은 따라가지 못해요. 특히 부동산이 문제입니다. 집을 사는 건 언감생심이고 소득 대부분이 임대료로 나가는데 결혼이나 출산을 꿈꿀 수 있겠습니까.“
7월 25일 타이베이 총통부 앞 집회에서 만난 30대 중반의 남성 2명은 저출생 원인을 이렇게 진단했다. 한국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미혼으로 자녀도 없었다. 대만 구인구직 플랫폼 '1111잡뱅크'가 2025년 12월 공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3명 중 2명은 경제적 부담 때문에 자녀 갖기를 포기했다.
대만의 젊은이들이 말하는 주거비 등 경제적 부담은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대만 노동부에 따르면 2025년 신규 취업한 대학 졸업자의 평균 초임은 월 3만6,000대만달러(약 162만 원)였다. 반면 대만 내무부 자료상 2025년 1분기 타이베이의 평균 주택가격은 3.3㎡당 123만3,000대만달러(약 5,549만 원)였다. 대졸 신입사원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3년을 모아야 고작 3.3㎡를 살 수 있다.
"소득으로 임대료 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보니 부모가 도와줘야 겨우 집을 살 수 있어요. 아예 부모와 함께 사는 청년도 크게 늘었어요." 부동산 가격과 청년 주거를 연구하는 장잉휘 국립정치대 토지경제학과 교수의 진단이다. 장 교수 연구에 따르면 30세를 기준으로 부모 소유 집에서 거주하는 비율은 1971~1976년생 집단에선 56.95%였는데, 1984~1991년생 집단에선 62.80%로 높아졌다.
혼인도 급격히 줄었다. 2025년 대만의 혼인신고는 역대 최저인 10만4,376건으로, 전년도보다 1만8,685건(15.2%)이나 감소했다. "결혼하고 아이도 둘 낳았어요. 아버지가 마련해준 집이 있어서 그나마 가정을 꾸릴 수 있었죠. 타이베이에서는 아주 작은 집도 3,000만 대만달러(약 13억5,000만 원)는 있어야 살 수 있는데 지금 벌이로는 어림도 없어요." 7월 22일 아들과 함께 타이베이 대형마트를 찾은 뤼엔(38)이 기자에게 들려준 얘기다.
'경제적 안정'이 '반도체 키즈'로
타이베이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70㎞ 떨어진 신주과학단지 인근 주거지 풍경은 대만 도시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TSMC 및 반도체 기업 종사자들은 TSMC 본사와 신주과학단지 핵심 구역이 자리한 신주시, 그리고 인접한 신주현에 주로 거주한다. 특히 고소득 엔지니어가 거주한다는 신주현 내 주베이시에서는 고급 아파트 단지 주변 공원에 어린 자녀를 데리고 나온 가족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경기 화성시 동탄신도시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다.
'대만판 동탄'의 합계출산율은 대만 평균을 웃돌았다. 2024년 합계출산율은 신주시가 1.015명, 신주현이 0.945명으로 대만 평균(0.885명)보다 높았다. 이 지역의 아동·청소년 증가는 반도체 일자리를 따라 젊은 가족이 유입된 영향이 크다. 높은 임금과 안정적인 고용, 그리고 기업의 출산·보육 지원까지 겹쳐 출산율을 높였다. 신주의 고급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부동산 중개인 셰리는 "반도체 산업 종사자는 소득이 높고 저축할 여력도 있어서 자녀를 둘씩 낳는 가정이 드물지 않다"고 말했다.
대만의 '국보급' 기업인 TSMC의 임금 수준은 특히 높다. 대만 구인구직 플랫폼 '104잡뱅크'에 따르면, TSMC 신입사원 초임은 대졸 사원 기준 월 4만4,580대만달러(약 200만 원), 석사 이상은 6만6,430대만달러(약 299만 원)였다. 대만 전체 신입사원 평균보다 각각 24%, 85%가량 높다. TSMC는 출산 지원금을 지급하고 직장 보육 시설을 운영하는 등 사원 복지도 최상급이다.
이는 'TSMC 키즈'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TSMC에 따르면 2024년 자사 직원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는 2,450명으로, 대만 전체 신생아(13만8,986명)의 1.8%를 차지했다. TSMC의 20~64세 직원 수가 같은 연령대 대만 전체 인구의 0.49%라는 점에서, 대만의 저출생 기조를 TSMC가 완화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TSMC는 "대만에서 한 해 태어난 아기 50여 명 중 한 명이 'TSMC 아기'"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아이 없어 고민? 학교 없어 고민
주베이 등 반도체 클러스터 배후 주거지는 낮은 출산율을 고민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늘어나는 속도를 학교나 돌봄 시설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을 걱정한다. 주베이에서 만난 한 여성은 "이 동네는 아이가 많아서 입학 경쟁률이 매우 치열하다"며 "자녀가 학교에 들어갈 때쯤에는 학교가 확충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7월 22일 찾은 신주현 류자고교도 학생을 더 수용하기 위한 시설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류자고는 기존 2만6,000㎡ 부지 옆에 1만㎡를 추가로 확보해 건물을 새로 짓고 있다. 장위에메이 교장은 "2015년 학생 수가 600명이었는데 현재는 1,100명으로 늘었다"며 "저출생으로 대만 공립학교의 학급당 학생 수가 30명 안팎까지 줄었지만 우리 학교는 38명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만난 학생들은 "친구들 절반가량은 부모 중 최소 한 명이 반도체 산업 종사자일 것"이라고 말했다.
대만 남서부에 위치한 타이난의 상황도 비슷하다. 2017년 TSMC 3나노 공장 입지가 타이난과학단지로 확정되자 공장 인근 주거지인 롄탄리의 인구는 2018년 3,300명에서 올해 6월 7,643명으로 늘었다. 천쯔징 이장은 "14세 이하 인구가 2,500여 명으로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저출생이 심각한 대만에서는 보기 드물게 아동이 많다"고 말했다.
이곳에서도 학교와 돌봄 시설이 인구 증가를 따라가지 못했다. 천 이장은 "조만간 문을 열 예정인 0~2세 대상 공공 탁아소에 언제부터 아이를 맡길 수 있느냐는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교생 27%가 TSMC 직원 자녀"라는 타이난 롄탄초중학교 쉬자링 교장은 정원 미달 걱정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며 교육 수요를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정책 실패라는 분석도 나온다. 쉬원타이 국립대만대 경제학과 교수는 "공장이 늘어나는 속도에 맞춰 학교가 확충되지 못하고 있다"며 "신주 등에 사는 부모들은 자녀가 다닐 학교를 찾느라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열 '활활'... 주커마마의 등장
대만에서는 '주커마마'(신주과학단지 엄마)라는 말도 통용되고 있다. 남성 엔지니어의 장시간 노동 탓에 배우자가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가구를 가리킨다. 외벌이라고 해도 반도체 업종의 임금 수준이 높기 때문에 여성이 사회적 지위와 경력을 내려놓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전업 양육자가 출산율을 높이는 요인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주커마마는 과학단지 고소득 가구의 생활방식을 뜻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이들의 일상을 필라테스, 애프터눈티 등 고급 소비로 묘사하는 게 대표적이다. 경제적 여유에 대한 부러움이 녹아 있지만, 특권층에 대한 반감도 섞여 있다. 로저 리우 국립중산대 교수는 TSMC 직원 배우자들이 참여한 온라인 대화방 내용이 외부에 공개되면서 논란이 일었던 사례를 들며 "과학단지 일부 가구의 폐쇄적인 관계망과 우월감은 비판 대상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다만 주커마마가 반도체 도시의 보편적 가족 형태라고 보기는 어렵다. 과학단지가 조성되기 전부터 주베이에 살았다는 한 여성은 "주커마마보다 입주 보모를 두고 아이를 맡기는 맞벌이 부부도 꽤 많다"며 "남편뿐 아니라 아내도 좋은 직업을 갖고 있어 어느 쪽도 일을 그만두지 않고 있으며 그만두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자녀에게 투입되는 교육 자원에도 지역·소득에 따른 차이가 뚜렷하다. 교육열이 높은 대만에서도 고소득 반도체 가구가 몰린 지역의 교육열은 특히 뜨겁다.
주베이의 고급 주택가 세 곳을 둘러보니 아파트 1층 곳곳에는 영어·수학 학원과 입시학원이 들어서 있었다. 수업이 끝날 때쯤이면 자녀를 태우러 온 차량과 오토바이가 몰려 불법 주차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학원 앞에는 '고교 입시 전 과목 만점 가능' '전담 강사 개인 수업' 등의 광고 문구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조이'라는 영어학원에서 일하는 한 직원은 "대만 북부의 교육열이 높은 편인데 그중에서도 신주가 가장 뜨겁다"며 "아이들 부모 대부분이 반도체 산업에 종사한다"고 말했다. 이 학원의 수강료는 한 달 16시간 기준 4,000대만달러(약 18만 원)로 다른 지역보다 비싼 편이지만 늘 학생들로 붐빈다.
학교도 학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에 맞춰 특화 교육과정을 확대하고 있다. 롄탄초중학교 교사 레이는 "반도체 엔지니어는 대만에서 '인생의 승리자'로 여겨진다"며 "부모가 공부를 잘해서 성공했기 때문에 자녀 교육 내용과 방식에 대해 학교에 이런저런 요구를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교에선 학생들이 등교할 때부터 영어로 대화하도록 하는 이중언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류자고도 이중언어반과 생명의학반을 별도로 두고 있다. 장 교장은 "이곳 부모들은 자녀가 성적뿐 아니라 표현력과 사고력, 국제 감각을 두루 갖춘 인재로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처럼 대만에선 반도체 산업이 만든 소득 격차가 출산 격차를 거쳐 다음 세대의 교육 격차로 이어지고 있었다. 손숙미 한반도선진화재단 양성평등위원회 위원장은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느냐가 가족 계획까지 좌우하는 대만의 사례를 교훈 삼아, 한국도 대기업의 성과급 확대 및 중소기업과의 임금 격차가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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