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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앤현장] “같은 마을 사람들을 죽창, 곡괭이로···어린애들은 우물에, 불을 질렀다”
 
2026-06-25 11:13:36
이번 25일은 6·25 전쟁이 발발한지 무려 76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로서는 잊을 수 없는, 잊혀질 수 없는 호국보훈의 날이다. 이를 다시금 되새겨보며 이와 같은 비극을 예방 및 억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 그 누구도 이론(異論)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6.25 전쟁을 되새겨보는 기억의 방법은 대부분 '한반도에서의 국제정치' 내지는 한반도에서의 '국가총력전(戰)'이라는 전쟁과 같은 거대담론이 주를 이루어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6.25 전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이 또한 온당치 않다. 그 이유는 6.25전쟁의 성격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명분을 내건 북한 조선인민군에 의한 침략전쟁의 성격 뿐만 아니라 이와 함께 '기획적으로 자행된 집단학살(虐殺)'이라는 대규모 인권침해성 및 절멸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6.25전쟁을 들여다보는 것은 껄끄러울 뿐만 아니라 따갑고 불편하게 느낄 수 있다. 그늘에 가려져 있는 학살전쟁이라는 점도 불완전한 역사의 단면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에 대한 후속 연구나 조사 결과도 온전히 발굴되지 않고 있는 오늘날의 안타까운 정치현실인 탓도 없지 않다.

이러한 관점은 단순히 국가폭력(國家暴力)이라는 개념으로만 이해되지도, 해석될 수도 없다. 남침전쟁을 개시한 북한 조선인민군은 전쟁범죄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에 동조한 준(準)민병대와 같은 적대적 좌익세력들이 학살전쟁의 주체로 활동했다는 역사적 현실도 외면되어서는 아니되기 때문이다.

6.25 학살전쟁의 주체를 특정짓는 데에 있어 '좌익(左翼)'이라는 용어가 필요한 것은 실제로 북한군에 동조한 '그들'에 의하여 학살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대규모 학살사건의 형태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좌익동조(同調)세력'이라는 개념이 요구된다. 북한 조선인민군 소속이 아니면서도 같은 마을의 이웃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데 편승하여 또다른 학살 자행 주체가 되었던 '그들'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사건들이 역사 속에서 아직 파묻혀있고 세상에 나오기를 76년이 넘도록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남아 있는 자들,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 세대가 마땅히 되찾아야만 하는 역사현실의 또다른 그늘이자 과업으로 남아 있다할 것이다.

그래서 <펜앤>은 독자들에게 6.25전쟁 76주년 전날인 24일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자유민주연구학회·자유민주연구원·한반도선진화재단으로 진행된 <6.25 남침전쟁과 자유민주주의>에서 나온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정책세미나에서는 6.25전쟁에 대하여 장삼열(한미안보연구회 사무총장)·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장)·유광호(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이 발제를 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주목해야 하는 이는 바로 김광동 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의 이야기다. 다음은 그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한 내용이다.

[전문]

ㅡ6.25전쟁의 성격은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6.25전쟁은 전면 무력남침과 함께 대규모 학살(massacre)이 자행된 전쟁이었다. 전시 희생자 통계를 보면, 전투에 참여했던 군과 경찰보다 일반 국민의 사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국군 전사자 137,899명 및 22개 유엔군 전사자 37,902명 외에 일반 국민 373,599명이 전시 사망하였고, 총 62만명이 납치, 실종, 부상 등의 희생을 입었다. 침략 공산군 및 좌익에 의한 학살로 공식 확인된 피학살자 규모는 128,936명에 달한다. 북한지역의 사망희생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전시 3년간 사망자는 총 954,960명이었고, 매년 평균 사망자는 308,053명에 이르렀다.

ㅡ구체적인 숫자가 어떻게 되길래?
▲전시 학살피해 규모는 대한민국 통계연감(1952), 국방부 한국전쟁사(1977)는 각각 12만 2799명과 12만 8,936명으로 기록하고 있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정부(공보처)가 전쟁중 조사(1952년 3월)한 통계에는 5만 9,994명 희생자의 이름, 주소, 직업 등 인적사항과 피해 장소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학살이 가장 대규모로 자행된 전남 4만 3,511명, 전북 5,603명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서울 8천 5백명, 경기 7천여명 및 경북 6천 5백명, 충남 3천 6백여명 등이 다수를 차지한다.

ㅡ지역별로 차이가 있는지?
▲전남, 전북, 충남에 비해 서울, 경기, 강원에서는 학살 피해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은 접경지역의 특성상 학살대신 대규모 납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전시 총 8만 4천여명의 납치피해자중 서울 20,738명, 경기 16,057명, 강원 10,528명으로 학살피해와 달리 납치피해는 대부분 북과 가까운 지역에서 자행되었다. 결국 지역 특성상 북으로 끌고 가는 납치가 불가능했고, 잔존 공산군 및 좌익빨치산 투쟁이 집중되면서 군과 경찰에 의한 치안확보가 늦어졌던 전남북에서 학살피해가 집중되었다. 특히 산악 접경지역과 소규모 섬지역 등 치안확보가 어려웠던 전남 영광 2만 1천명, 영암 7천명, 장성 4천명 등이 집중 피해지역이 되었고 신안, 함평, 나주, 완도를 포함하여 서울수복이후 6개월이 지난 1951년 3월까지 군과 경찰에 의해 수복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지역에서 무차별학살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ㅡ전시 학살의 성격을 무엇으로 봐야 하는가.
▲6.25침략시 한반도에서 발생했던 학살에는 침략 공산군이 대한민국을 붕괴시켜 공산제국에 편입시키려는 군사전쟁을 펼쳐지면서도, 공산전체주의에 반대하거나 장애가 될 만한 계층과 인사들을 함께 대거 숙청, 제거하는 ‘혁명학살’의 결과였다.침략 공산좌익에 의한 학살은 크게 두가지 영역에서 펼쳐졌다. 첫째, 군사적 승리를 목표로 한 전쟁 수행과정에서의 무단 학살이다. 징병 거부자, 군수물자 지원과 동원 거부자, 혹은 부역 행위 및 재산 징발에 항거하는 국민을 무단 처형한 것이 그것이다. 둘째 남침이후 점령지역에서 공산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저항하거나 동조하지 않는 국민에 대한 대량학살이었다. 좌익들은 치안과 행정이 붕괴된 무질서 상황을 이용하여 공무원, 지식인, 자산가 및 지주계급을 목표로 하였고, 반공조직, 경찰조직과 가족 및 기독교인 등을 대상으로 한 무자비한 처형을 감행하였다.

ㅡ전시의 공산주의 과익세력의 학살을 구분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전시 공산좌익의 학살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진다. 첫째는 남침 전쟁의 시작과 함께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점령지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자행한 학살이다. 점령지역 과대 과정에서는 공무원, 경찰 및 경찰가족, 교직원, 면장과 리장 등 국가 중심세력에 대한 비교적 선별적 학살이다. 대규모 처형이었지만 20대에서 40대 남성을 중심으로 대상을 선별하고 ‘인민위원회’에 의한 ‘인민재판(人民裁判)’이라도 여는 등의 학살이었다. 그런데 1950년 7월과 8월 시기에도 곳곳에서 소위 반동분자라 부르는 지주, 공직자, 마을 유지와 부유층을 중심으로 비협조라는 명목으로 낫, 곡괭이, 장작 등에 의한 무차별 폭행 학살도 곳곳에서 대규모로 나타났다.

ㅡ점령지역에서 후퇴하던 1950년 9월 시점에서 당시 상황은 어떠하였는지?
▲ 바로 그 시기인 1950년 9월 25일 전후부터 학살만행은 전과 차원을 달리하는 대살륙(大殺戮)이었다. 무차별적 대량학살은 전국에서 잔혹하게 자행되었다. 학살방법도 낫, 죽창, 곡괭이, 장작 등이 등장했고 시신처리도 우물과 저수지, 바다 등에 집어넣는 잔혹하기가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공산좌익의 전면 퇴각하며 저지른 학살은 한민족사에 없는 대규모 학살이면서도, 세계사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대량학살이었다. 전남, 전북, 충남, 충북의 대량학살의 대부분이 그 시기에 발생하였다. 하나의 예로 전북 옥구군 미면을 보면 9월 27일부터 29일 사이 367명이 학살되었는데 총 574명의 학살 피해자중 여자가 128명이었고, 19세 이하가 52명, 60세 이상 노인이 10명이었다. 

ㅡ대략적인 피해를 보면 어떠한가.
▲각 지역별 형무소나 내무서나 혹은 분주소에 수감되어 있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처형부터 진행되었다. 대전형무소, 전주 형무소 및 청주형무소와 충남의 서천등기소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대전형무소의 경우 약 1,500-2,000명이나 되는 수용자들이 후퇴하면서 용두산, 도마리, 탄발리 등 으로 끌려나와 학살되거나 형무소 밭고랑과 우물에서 처형하였다. 전주형무소 1,000-1,400명, 청주형무소 200명 등에서 희생이 컸고, 광주형무소 220명도 당산, 너릿재 등에서 동일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충남 서천에서는 공무원 및 경찰가족과 대한청년단원 등 우익으로 분류되었거나 태극기 소지자, 혹은 공산군 협조 거부자 등 등기소에 수용했던 약 240-250명이 공산군 퇴각 직전인 27일 새벽 모두 불에 태워 학살했다.

ㅡ그 다음 학살의 경우는 어떤 경우가 있었는지?
▲공산좌익이 지배했다가 유엔군과 한국군에 의해 패퇴하던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주변의 신천, 안악, 은율 등과 평양 등에서도 극단적이고 가혹한 학살만행을 자행했다. 실제 황해도 지역에서 전쟁중 기독교도 및 반공세력과 공산좌익간의 대결로 신천군에서 3만명을 포함, 황해도 전역에서 약 7만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지역 퇴각과정의 학살은 평안도, 함경도 등에서도 광범위하게 펼쳐졌고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 및 미군에 협조했다거나 환영했다는 이유 등으로 자행되었는데, 아직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ㅡ전시학살 사건에 있어 지역적인 특징이 있는지?
▲무차별적 집단학살의 상당부분은 전라남북도 지역에서 가장 대규모로 자행되었다. 전남북 지역에서 학살규모가 컸던 것은 조선로동당 전남도당(道黨)이 지휘했던 화순 백아산, 전북도당(道黨)이 은거했던 순창 회문산 등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대한 기습 학살이 서울수복이후에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북한은 제2전선을 유지해 한국 군의 배치를 분산시키기 위해 지리산, 무등산, 회문산, 백아산, 회문산 등을 중심으로 순창군당 260명, 무주군당 130, 임실군당 310명, 장수군당 470명 고창군당 590명 식으로 지역유격대를 조직하여 정규 군과 경찰과 대항하며 10월 말까지, 심지어 1951년 3월까지 무차별적 학살을 감행하였다.

ㅡ학살 피해 사례 중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학살피해의 예로 전남 신안지역의 경우도 임자면, 자은면, 지도음, 증도면 등에서 조사 확인된 주민희생자만 758명이었다. 1950년 7월부터 10월짜지 약 4개월에 걸쳐 남성 393명(52%), 여성 365명(48%) 10세 이하 1919명(16%), 60세 이상(58명(8%)라는 통계가 보여주듯 거의 대부분이 가족 몰살의 형식으로 무차별적 학살이 자행되었다. 전남 무안 해제면의 경우 10월 3일 밤에서 4일 새벽 약 3시간에 걸쳐 천장리 주민 150명이 집단 학살당했다. 신안군의 해제면 참매리와 임자면 도찬리 등에서는 우익활동자와 그 가족을 ‘반동분자’라는 명목으로 대규모 집단 살해이 자행된 대표적인 곳이며, 신안군 청계면 복길리는 소위 '우익(적대) 마을'이라는 이유로 마을 주민 86명을 집단 학살하기도 했다. 그 방식은 해안가로 몰아가 죽창, 괭이, 칼, 곤봉 등으로 살해하고 바다 쪽 절벽으로 떨어뜨려 학살했으며, 10세 이하 어린이들은 주변 우물에 집어넣어 집단 살해시키는 방식이었다.

ㅡ이렇게 학살의 주요 대상에 있어 구분하면 어떻게 되는지?
▲학살의 주요 대상으로는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키는 활동을 주도했던 인사들이었다. 당시는 대부분 ‘반동분자’ 혹은 ‘악질’이라 불리었고, 그것은 북에서 공산체제를 만들 때나, 침략전쟁을 감행한 이후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공산체제를 거부하는 대상에 붙여진 명칭이다. 전, 현직 공무원이거나 면사무소 직원과 마을 이장, 대한청년단 단원, 교도관 등 행정을 담당했거나, 치안유지와 보조 활동을 했던 경찰, 의용소방대원, 청년단원 등이 처형대상이 되었다. 점령 초기에는 경찰과 대한청년단 등 반공활동가 등이 공산좌익의 주된 처형 대상이었지만 점차 무차별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ㅡ소위 '반동분자'라는 것인가?
▲그렇다. 대한민국 주도세력은 그 자체로 ‘악질, 반동’으로 분류됐다.대표적 예로, 충남 홍성지역 희생자 제1차 조사결과 19명의 희생자들은 모두 직업과 활동에 있어서, 면서기와 마을 이장 등 지역 공무 담당자, 철도경찰, 대한청년단 단장 및 청년단 회원, 경찰지서 지원활동자, 국민회 분회장, 국민회 회원, 치안유지대 대원, 지방법원 서기 등이었다. 이는 충북 제천, 충주 등 다른 지역에 대한 조사에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났다. 전남 영광에서도 전현직 면장, 공무원, 교장 등 교직자, 군인과 경찰 가족 및 대한청년단 단원과 대한국민회 간부 등이 1950년 8월 6-7일에 낫, 돌, 각목 등으로 일제히, 집중적으로 처형되었다.

ㅡ그런 이들에 대한 학살 규모와 방법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식자(識字:배운사람)에 대한 학살과 함께 진행된 9만 6천명의 납치자의 직업 분류 통계를 보면 국회의원 63명, 판사 및 검사 90명 경찰 1,613명, 공무원 2,19명 변호사 100명 및 교수와 교직원 863명, 의사와 약사 526명이었다. 마을 주민을 모아놓고 손을 만져보고 농사짓는 손이 아닌 사람들이나 안경을 쓴 사람 등을 골라 그 자리에서 학살하는 방식도 있었다. 특히 퇴각기에는 대전, 전주 및 청주형무소 등에 강제수용시켰다가 퇴각하면서 이루어진 학살희생자 대부분이 바로 대한민국 식자층이었다.배운 사람들(엘리트)에 대한 학살과 함께 진행된 9만 6천명의 납치자의 직업 분류 통계를 보면 국회의원 63명, 판사 및 검사 90명 경찰 1,613명, 공무원 2,19명 변호사 100명 및 교수와 교직원 863명, 의사와 약사 526명이었다.

ㅡ배운 사람들이라면 사회지도층인 것 같은데, 가장 피해가 컸던 경우는?
▲경찰과 경찰 가족들의 피해가 가장 대규모적이었다. 군인은 전선으로 나가있고 군조직은 지역사회에 분리되어 활동했지만, 치안을 담당했던 경찰은 지역사회에 살아가며 공산좌익과 대결해야 했기에 공산좌익에 가장 쉽게 노출되고 피해나가기 어려운 ‘반동적 적대’세력이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리산, 불갑산, 백운산 등 입산 공산군 및 지역빨치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경찰과 경찰가족은 점령기간 3개월은 물론 전시 3년 내내 공산좌익의 희생대상이 되었다. 경찰과 경찰가족의 희생은 특히 영암, 신안, 무안, 완도, 진도, 정읍, 전주 등 전라남북 및 강경 등 충청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났는데 그 대부분은 산악지역을 거점으로 공산좌익이 수시로 출몰했던 지역이란 공통점을 갖는다.

ㅡ학살의 주체가 도대체 누구인가? 어떻게 구분되는가?
▲학살 주체는 공산군인 경우와 지방 좌익으로 나뉘는데, 지역 좌익의 무단 학살이 더 잔혹하고 무차별적이었다. 사적 관계에서 발생했던 복수심이나 무단적 재산 빼앗기에 의해 발행하는 경우도 많았다.공산군 제6사단이 점령했던 전남 영광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조직하고 곧 바로 군수, 읍장 등 행정담당자들을 집단살해하고 연이어 조합장, 군과 경찰의 가족 및 우익단체 단원 및 그 가족에 대한 처형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점차 공산군 비협조자, 기독교인 및 지주와 자산가층 등으로 확대되었다. 무차별 대량학살의 예로 염산면 219명, 백수면 111명의 학살이 확인, 조사된 바 있는데, 확인된 영광지역 희생만 보더라도 남성 324(57%)이었고, 여성이 242명(43%), 10대 이하가 226명(30%)라는 거세서 보듯 전형적인 무차별적 대량학살이었다.

ㅡ다른 경우도 있는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우도 있다.  6.25전쟁 전부터 북한 정치보위부는 기독교의 목사, 집사, 전도사, 장로 등을 숙청, 제거의 대상으로 삼았고 천주교 신부와 수녀 등과 천도교도 반동적인 것으로 지목해 탄압, 제거대상으로 삼았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직권조사를 결정(2022.5.24.)하여 조사된 결과만을 보더라도 전쟁기간중 대한민국에서 약 1,700명의 종교인들이 신앙을 이유로 대량 학살당하였다. 대부분 천주교인을 포함한 기독교인이었으며, 특히 전라지역과 충남지역 등에서 집중적 학살이 자행되었다.

ㅡ기독교인 학살 사례가 알려진 게 있는지?
▲기독교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1950년 9월과 10월, 충남 논산 성동면 병촌교회 66명와 우곤교회 33명의 집단희생과 전남 영광 야월교회 65명, 영광 백수읍교회 36명, 영광의 염산교회 77명, 그리고 신안군 임자면 진리교회 65명의 집단희생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전남 영암군만 별도로 보더라도, 구림교회 19명, 상월교회 26명, 영암읍 교회 25명, 천해교회 10명 등 총 8곳의 교회에서 89명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집단학살 방식도 구림교회에서는 10월 7일 공산좌익들은 우익인사 10명과 함께 교인 18명을 주막에 집단 감금하고 공산군들이 집총 포위한 채 섭나무로 둘러쌓고 불을 질러 태워 죽이는 끔직한 방식이었다. 상월교회 학살의 경우 교회장로(이홍길) 집에 교인들을 모두 모이도록 한 후 25명 전원을 죽창과 칼로 집단 살해하는 끔직한 방식이었다.

ㅡ천주교 피해사례도 있을 것 같은데.
▲천주교인에 대해서도 신부 17명을 포함하여 수녀, 복사, 신학생은 물론 독실한 천주교인이 곧 ‘미국 제국주의 첩자’라는 명목으로 여성 24명(37.5%) 등 64명을 학살시킨 것으로 확인되었다. 전시 첫 천주교 희생은 전방 춘천지역의 앤서니 리어 신부였는데 성당에 공산군이 들이닥치자마자 신부라는 신분을 확인하고 미국 스파이라며 바로 무단처형하였고, 다른 곳도 대부분은 유사한 방식을 취했다. 그 외 전북 고창 선운사 주지가 공산군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처형되는 등 대종교, 천도교, 불교 등의 종교인 희생이 확인된다. 한반도에서 공산체제의 성립과 침략전쟁에 따라 조사, 확인된 학살 사례만 1,700명을 넘는 대규모 학살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한반도는 200여년에 걸쳐 세계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수준의 기독교도에 대한 대량학살이 계속된 땅이기도 했다.

ㅡ충청과 전라지역 등의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충청지역과 전라지역을 중심으로 점령지역 곳곳에서 부유층은 ‘반동’ ‘악질’로 지목되어 희생되었고, 그들의 재산과 상대적으로 넓은 집은 전쟁 징발의 첫 번째 대상이었다. 상대적으로 많은 토지를 가졌던 마을별로 반장, 이장, 면장, 조합장, 의용소방대원, 대한청년단, 지역방위대 등 활동자들이 중점 희생대상이었다. 공산군이 점령한 시도와 각 군과 면, 리 단위로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를 조직하고 각 인민위원회는 인민재판을 개최하고 지주 및 자산가 계층을 반동으로 규정하여 집단 살해하였고, 무단으로 재산을 토지, 산림, 배와 심지어 가재도구 등을 빼앗아 나눠 갖기도 했다. 예를 들면 어느 정도 재산을 가졌거나 사상이 불순하다고 분류된 전남 완도 소암면 횡간리 주민 32명이 한꺼번에 수장(水葬)되기도 했다. 전남 영광 월평리 희생자 조사도 경제적으로 부유하거나 전쟁수행에 비협조했다는 명목으로 월평마을 50여명을 한꺼번에 처형하기도 했다.

ㅡ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전쟁학살 피해는 75년 전에 있었고 현재는 실질적으로 침략 전범에게 책임을 묻고 보상받게 될 기회가 거의 사라진 상황에서 북한에 의한 직접 보상원칙을 견지하며 공산좌익에 의한 학살희생을 방치한다는 것은 역사 정의(正義)에 반하는 것이다.역사기록을 바로잡아야 한다. 침략전쟁의 피해 당사국인 한국의 각종 공적 기록에는 침략세력이 자행한 학살만행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고등학교교 교과서에도 침략 전범(戰犯)세력이 저지른 대규모 학살을 단 하나도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다. 민족최대 희생일인 9월 26일을 전쟁학살 추모일로 지정하고 감춰왔던 학살만행 사건을 교육과정에 반영해야 한다.

전술한 김광동 전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의 이야기는 6.25 전쟁에 관하여, 그동안의 관점(거대담론중심)에 있어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을 함유하고 있다. 단순히 국가단위 수준의 전쟁이 발생하였고, 전쟁 주체 세력의 침략에 이어 점령과 퇴각에 이르기까지 '군사적 충돌이라는 형식'만으로는, 역사상 존재하고 있는 북한 및 동조세력들에 의하여 자행된 대규모 학살과 처형이 해석될 수 없다는 게 그의 관점일 것이다.

그가 있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국가폭력에 관한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치유 및 역사적인 화해를 위한 곳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동안 6.25 전쟁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전쟁 및 헌법체제 등과 같은 종래의 관점과는 달리 우리가 놓치고 있던 관점의 사각지대가 있을 수 있다.

군경에 의한 희생, 북한 조선인민군에 의한 처형·학살, 그들 조선인민군에 동조하여 지역에서 같이 살아온 같은 마을 사람들을 대량학살·집단처형하는 데 앞장섰던 이들에 대한 응보감정 또한 역사적 정의실현이라는 취지를 고려한다면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사안일 것이다.

시간이 76년 흘러갔지만 북한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자행된 대규모 민간인 처형 및 학살에 관한 기록은 아직도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이를 모아 풀어내고 기록해야 것 역시 6.25전쟁 제76주년을 맞이한 남은 자들, 현재를 사는 남은 세대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한편, 이번 정책세미나는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이 주최하였으며 이 자리에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의 박재완 이사장과 조영기 사무총장,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과 김광동 전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하여 정점식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유용원ㆍ강선영ㆍ박충권ㆍ김정재 국민의힘 의원, 여의도연구원 관계자 등 100여명이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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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3 [뉴데일리] "6·25, 안 끝났다" … 국회 세미나서 쏟아진 '남침전쟁·자유민주주의' 경.. 26-06-25
2242 [펜앤현장] “같은 마을 사람들을 죽창, 곡괭이로···어린애들은 우물에, 불을 질렀다” 26-06-25
2241 [주간조선] “성과급 논의, 미래 노동시장 갈등구조 예고편” 26-06-23
2240 [신동아] 증시만 호황인 건 비정상, 실물경제도 같이 살아야 선진국형 26-05-27
2239 [서울경제] “성과급도 쟁의 대상”…노란봉투법 회색지대 파고든 삼성노조 26-05-21
2238 [월간조선] 미국의 독일 주둔 미군 감축, 남의 일 아니다 26-05-18
2237 [주간조선] 지방소멸 시대의 선택지… 행정통합, 약인가 독인가 26-05-18
2236 [중앙일보] 조직률 13% 노조, 전체 근로자 대표해야 상생 길 열린다 26-04-29
2235 [월간조선]"청년 보수 재건 전제 조건은 ‘청년이 따르고 싶은 어른의 존재’"(박은식.. 26-03-26
2234 [이데일리] AI 시대 청년 일자리 해법은…“경험 쌓을 기회부터 늘려야” 26-03-13
2233 [파이낸셜뉴스] "막는 경제에서 여는 경제로… 시장에 정책 유지 신뢰 줘야" 26-02-23
2232 [독립신문] 4년임기 국회의 입법독재, 항구적 대한민국의 입헌질서를 허물고 있다 26-01-16
2231 [조선일보] "극단의 적대 정치, 다수의 폭정이 지배한 1년… 레이건식 협치 절실" 26-01-12
2230 [주간조선] 우리는 감옥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26-01-05
2229 [이데일리] 오문성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시급한 韓 방어 수단” 25-12-26
2228 [월간조선] 《대한민국의 사명 2026》 펴낸 박재완 이사장 25-12-22
2227 [뉴데일리] 李 정부 부동산 정책, 규제만 남아 … 실수요자·세입자 부담만 키웠다 25-12-22
2226 [이데일리] 규제 늘렸더니 집값 더 올랐다…李정부 부동산 ‘역효과’ 경고 25-12-19
2225 [펜앤마이크] "李정부, 규제역설 외면하면 최대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들일 것" 2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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