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표 박재완 변양호 윤영관 정갑영 진대제(이상 가나다순). 정·재계와 학계, 관료 사회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를 이끈 ‘하이브리드형’ 국가 원로들은 앞으로 60일 동안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야별로 제시했다.
정치 분야에서는 제왕적 대통령 제도의 폐단을 해소하기 위해 4년 중임제 및 의원내각제 개헌을 통해 행정부와 입법부가 공생하는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를 위해서는 대화와 타협을 불가능하게 하는 현재의 소선거구제도를 중대선거구제로 전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1등만 살아남는 첨단 과학기술 패권 경쟁에 들어간 경제 분야에서는 정부가 민간 기업의 투자 절반을 지원해서라도 ‘글로벌 넘버 원’ 산업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초당적 국회 결의로 한덕수 대행 '對美 협상'에 힘 실어야"
美, 韓리더십 공백 안 기다려…현 체제에 힘 싣는 게 급선무
“조기 대선에서 어느 당이 집권하든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행정부가 미국과 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국회 결의를 서둘러야 한다.”(김진표 전 국회의장)
김진표 전 국회의장 등 한국 정·재계와 관료 사회를 이끈 국가 원로들은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하기 전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세전쟁에 맞설 한덕수 권한대행 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입을 모았다.
김 전 의장은 6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시아를 방문한 피터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관이 한국만 빼놓은 건 트럼프 정부가 한국의 리더십 공백을 기다려주지 않겠다는 신호”라며 “트럼프 정부와 협상에 나서는 대행 정부 장관들의 협상력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려면 여야가 협의체를 구성해 조선과 방위산업 분야 등에서 대행 정부가 미국과 맺는 협상을 대선 결과에 관계없이 지킨다는 국회 결의를 해줘야 한다”며 “그래야 미국 장관들이 한국 장관을 상대해줄 것”이라고 했다.
삼성전자 대표와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도 “한 권한대행은 통상교섭본부장과 주미대사, 경제부총리를 지낸 경제와 통상 전문가”라며 “선거 전에 비상대책기구를 설치하는 등 한 권한대행 체제에 힘을 실어주는 게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진 회장은 “대선이 본격 시작되면 여야가 함께하는 협의체는 생산적으로 진행되기 어렵다”며 “사안별로 국가 원로와 전문가들이 참가하는 회의체 등을 구성해 의견을 수렴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갑영 전 연세대 총장은 행정부 범위를 넘어서는 더 큰 틀의 협의체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정 전 총장은 “트럼프 관세는 어느 측면으로 보나 무리가 있어 발표한 대로 실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협상의 여지가 있는 만큼 바게닝파워(협상력)를 키워야 하는데 대선 이후는 이미 늦다”고 지적했다. 그는 “행정부뿐 아니라 사회 각층이 참여하는 경제 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대행 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발 충격을 계기로 기존 외교 및 통상 전략을 바꿔야 한다는 조언도 이어졌다.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윤영관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은 “조 바이든 전 미국 행정부 때와 달리 더 이상 가치외교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며 “일종의 상인정신을 바탕으로 한 실용주의 외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 이사장은 다만 “미국이 한국과의 동맹을 저버렸다고 가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중국 억제를 가장 중요한 전략으로 삼는 미국 입장에서 한국이 여전히 전략적으로 가치 있는 나라라는 점을 강조하며 되도록 확장 억제가 손상당하지 않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조선업, 방산, 원자력 등 미국이 필요로 하는 산업을 카드로 파트너십을 구축하며 한국과는 함께 가야 한다는 인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세 전쟁으로 기존 글로벌 공급망이 무력화하는 것과 관련해 윤 이사장은 “인도를 포함한 글로벌사우스(아프리카, 남미, 중앙아시아 등 주로 남반구에 있는 신흥국)로 공급망을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국에만 집중하던 외교 전략을 바꿔야 할 때라는 주장이다.
개헌·선거구제 개편으로 승자독식의 정치 바꾸자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줄일 수 있도록 남은 2개월 동안 4년 중임제와 이원집정부제 형태로 개헌하고, 3년 뒤 총선에서 의원내각제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
국가 원로들은 3명의 대통령이 탄핵소추 당한 비극이 재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개헌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김 전 의장은 4년 중임제와 의원내각제로 이어지는 2단계 개헌을 주장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김 전 의장은 지난 21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맡았다. 더불어민주당 출신 국회의장이지만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법안은 본회의 상정을 거부하는 등 균형감 있게 입법부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전 의장은 “현행 대통령제의 치명적 단점은 여대야소일 때는 제왕적 대통령, 여소야대 국면에서는 식물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라며 “행정부와 입법부가 마주 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충돌을 일삼는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헌법을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집권 초기 여론을 무시한 장관 임명과 이에 반발한 야당의 타협 없는 입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야당의 주요 각료 탄핵 그리고 비상계엄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에서 개헌의 방향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은 대통령 권한을 일정 수준으로 제한하는 4년 중임제와 이원집정부제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그는 “미국은 의회가 고위직 1573명에 대한 인사 동의권과 예산 편성권을 갖고 있지만 한국은 둘 다 대통령이 쥐고 있다”며 “인사권과 예산 편성에 국회 의사를 반영하는 경로를 만들면 대통령과 국회가 대화와 타협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선진국은 합의할 수 있는 사안은 먼저 진행하고 이견이 있는 사안은 대화와 타협으로 푸는 ‘스텝 바이 스텝’의 정치를 하는데 한국은 ‘김건희 특검법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한다’는 식의 ‘올 오어 낫싱’의 정치를 한다”며 “23대 총선이 치러지는 3년 뒤에는 행정부와 입법부가 운명 공동체가 되는 의원내각제로 바꾸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박재완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은 “국민 선호도와 한국 정치 현실을 감안하면 의원내각제 전환은 쉽지 않다”며 “대통령 권한을 분산하는 한편 의회도 양원제로 바꿔 졸속·땜질 정책을 남발하는 것을 제어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로들은 승자독식의 정치 풍토를 바꾸기 위한 필수 과제로 소선구제 개편을 공통으로 꼽았다. 김 전 의장은 “수도권 국회의원 선거에서 사표가 많을 땐 48%까지 나온다”며 “한 표만 이기면 모든 걸 갖는 승자독식의 선거제도가 죽기살기식 선거의 부작용을 낳는다”고 말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부정선거 주장이 가시지 않는 것도 사표 비율이 높기 때문”이라며 “국회의원이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를 위해 헌신·봉사할 수 있는 선거 시스템은 중대형선거구제”라고 강조했다.
김 전 의장은 선거구 개편을 위해 여러 차례 실시한 시뮬레이션 결과를 소개했다. 현재 49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을 한 명씩 뽑는 서울을 12개 선거구에서 4명씩 48명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로 바꾸면 제1당이 아무리 대승을 거둬도 30석을 넘기기 쉽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김 전 의장은 “여당 텃밭인 강남에서도 한 당이 4석을 싹쓸이하는 구도는 나오지 않고, 사표 비율은 3%까지 떨어진다”고 말했다.
국민통합 메시지 낼 리더를 선출하자
국가 원로들은 심리적 내전 상태에 빠진 사회를 추스르고 전례 없는 불확실성 속에 허우적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국민을 통합해 미래로 이끌 리더를 뽑는 게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박재완 이사장은 “정치가 힘을 모으는 역할보다 상대를 헐뜯고 힘을 빼는 데 집중하고 있다”며 “100여 년 전 국내 갈등을 극복한 북유럽 국가들처럼 너그럽고 편안하며 각자가 열심히 하면 전체 시너지가 커지는 나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국민과 기업의 인식도 절박하지 않고 정책을 밀어붙일 토양도 약하니 혁신이 발 빠르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국민에게 ‘한국이 선진국 문턱에서 주저앉을 수 있는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고 상황을 제대로 인식시키고 개혁과 혁신에 힘을 실을 대선 주자가 나와야 한다”고 했다.
정갑영 전 총장은 “지지자만을 위한 팬덤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며 “다른 생각을 가진 쪽을 배려하고 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차기 대통령은 정권 교체 여부와 상관없이 국민 경제가 지속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로드맵을 잘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의장도 “외환위기보다 훨씬 중차대한 종합적인 위기 국면을 온 국민이 힘을 모아 극복할 때”라며 “이제는 국민 통합의 길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이 싸움 잘하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 합의에 능한 정치인을 뽑아줘야 한다”며 “대화와 타협, 합의를 잘하려면 정책적 역량을 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술 패권경쟁 시대, 세계 1등 미래산업 5개 만들자"
트럼프發 복합위기…구조개혁 골든타임으로
경제 원로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발 관세전쟁 충격을 계기로 우리 경제의 구조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1997년 외환위기처럼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변양호 VIG파트너스 고문은 “우리 경제의 문제는 왜곡된 약자 지원 방식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리·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라며 “그 결과 국민의 잠재력을 최대 한도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결함이 많아졌다”고 진단했다. 특히 “근본적인 구조개혁을 미루고 대신 해고를 어렵게 하거나, 최저임금을 과도하게 인상하는 등 땜질식 경제정책으로 대처하다 보니 경제 운영 시스템이 굉장히 후퇴했다”고도 지적했다. 시장원리에 따라 복지·노동·사회 제도를 총체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게 변 고문의 인식이다.
그는 “경제 운용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다 보니 경제적 약자는 제대로 된 지원을 못 받고, 기업은 두 팔이 묶인 채 경쟁력이 낮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 세계 평균의 절반에 불과한 올해 성장률 전망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변 고문은 스웨덴 수준의 복지 지출을 시행할 각오로 세금을 더 걷어 사회안전망을 재설계하고, 기업 규제를 미국 수준으로 완화하는 대신 지배구조를 정상화하는 패키지 구조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잘하는 사람을 못 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약자를 지원할 게 아니라 부가가치세 등을 더 걷어서 사회 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며 “기업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대신 일본 도요타자동차처럼 최선의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최고경영자(CEO)를 선출할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재완 이사장도 “인구가 감소하는 가운데 미국보다 떨어진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방법은 생산성 향상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제도 혁신이 필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제조업에 비해 생산성이 크게 떨어지는 서비스산업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육성하고, 기업의 발목을 잡는 노동 규제 혁신을 이번 기회에 ‘사즉생’의 각오로 해내야 한다”며 “신산업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동시에 인재 양성 시스템, 조직문화도 모두 바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혁신을 통해 경제 시스템을 역동적이면서도 유연하게 바꾸지 않으면 생산성을 높이기 어렵고, 괜찮은 일자리와 우수 인재는 해외로 빠져나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진 회장은 기업 거버넌스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상속세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업 경영권을 후세에 물려주는 과정에 여러 편법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그 결과 경영을 물려받는 사람도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된다”고 설명했다. 진 회장은 “유럽에서 가장 못 살던 아일랜드가 법인세를 크게 낮춰 글로벌 대기업을 대거 유치했다”며 “이런 해외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 이사장은 정부 정책과 법원 판결이 ‘사용자 대 근로자’의 프레임 안에서 약자인 근로자를 보호하는 데만 맞춰지는 후유증이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경제와 인구 구조가 변하는 이제부터는 “근로자보다 더 입지가 약한 미취업자와 미래 세대까지 내다보고 정책을 다듬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兆단위 투자 시대…정부가 절반 보조해야
김 전 의장은 우리 경제의 생존전략에 대해 “미래를 좌우할 30개 산업에서 적어도 5개는 1등을 해야 세계 10위권 유지가 가능하다”고 제시했다. 1등만 살아남는 첨단 과학기술 패권 경쟁 시대를 맞아 우리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AI)과 양자, 바이오와 같은 미래 산업은 1등이 해당 산업을 독식하지만 하나같이 엄청난 투자비용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다. 김 전 의장은 “패권 경쟁에서 1등을 유지하려면 경제정책도 과거와 달라져야 한다”며 “그런데 이를 주장하는 국무위원이 안 보인다”고 안타까워했다.
그가 조바심을 내는 이유는 미국과 중국, 일본, 유럽연합(EU)의 움직임이 예전과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들 국가는 조(兆) 단위 투자를 민간에만 맡기지 않고 정부가 적극 보조하고 있다. 10조원 투자가 필요하면 정부가 50% 정도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김 전 의장은 “10조원이 넘는 리스크를 민간기업 홀로 짊어지라면 누가 투자할 수 있겠느냐”며 “우리 정부는 이런 부분에서 너무 인색하다”고 말했다.
경쟁국 정부가 첨단 과학기술 투자의 절반을 보조하는 건 설사 실패하더라도 투자로 얻은 기술이 다른 분야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그는 정부와 광역·기초 지방자치단체, 민간 기업이 모두 참여하는 ‘메가펀드’ 구상을 제시했다.
변 고문은 이사의 의무를 강화하는 상법 개정안이 ‘이사회의 변양호 신드롬’을 낳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변양호 신드롬은 2006년 현대자동차 로비 의혹과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 사건 당시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던 변 고문이 두 차례 구속되고, 142차례 재판받는 등 4년 넘게 곤욕을 치르는 것을 본 공무원들이 절대 책임질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현상을 말한다. 두 건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변 고문은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로 확대하면 당시엔 올바른 결정이었는데 나중에 문제가 발생해 사외이사들이 소송에 휘말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상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사외이사들은 이사회 출석을 안 하거나 기권할 것”이라며 “이사회는 ‘식물 이사회’가 되고, 기업은 마비될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의 중대한 문제를 사외이사로 해결하려는 발상 자체가 탁상공론”이라고도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