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30 10:57:05
한국에서 혁신기업 성장이 힘든 가장 큰 이유로 '지켜야 하는' 조항을 상세히 명시하는 대륙법계 '포지티브(Positive) 규제'를 적용한다는 점이 꼽힌다. '금지된 것만 하지 않으면' 도전이 자유로운 영미법계 '네거티브(Negative) 규제'와 달리, 법 바깥의 기술이 나올 때마다 개정이 필요해 우후죽순 자라는 신산업을 포용하기 어렵다.
이를 보완하려 영국을 본떠 2019년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했지만, 기업은 여전히 비효율에 난항을 호소한다. 글로벌 100대 유니콘 기업 중 한국 기업이 단 한 곳(토스)뿐인 이유로도 꼽힌다. 정부는 "2027년까지 5곳으로 늘리겠다"고 밝혔지만, 규제 샌드박스가 거듭나지 않으면 달성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한국일보는 21일 곽노성(가나다순) 연세대 글로벌인재대 교수, 양용현 한국개발연구원(KDI) 규제연구실장, 양준석 한국규제학회장, 원소연 한국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재훈 성신여대 법학부 교수·변호사, 최성진 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 등 전문가 6인의 개선 방향을 들어봤다.
-신기술 사업화가 늦는 주요 원인은.
곽노성=한국이 절박하지 않아 보인다. 안주하다간 경제 성장이 정점을 찍고 하락하는 '피크 코리아'를 피할 수 없다. 규제 때문에 '일단 해외에서 성공하면 국내에선 받아 준다'며 스타트업이 유출되는데, 향후 한국에서 혁신기업이 자취를 감추는 공동화 현상이 우려된다.
최성진=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규제 샌드박스(8개)를 갖고 있는데, 규제가 많다는 방증이다. 영국은 애초 규제를 풀어 주는 걸 전제로, 특례 기간 소비자 피해 등 위험이 발견되지 않는 한 사업을 가능케 해 준다. 한국은 '규제를 풀어 줄진 알 수 없지만 해 보라'는 식이라 불확실성이 더 크다.
원소연=일단 위험 여부를 실험해 보자고 도입했는데 승인받기도 힘들고, 부가 조건이 과도하게 붙는다. 부가 조건에 맞춰 사업을 준비하면 1년도 걸린다. 규제 샌드박스가 많아져 제도가 복잡해졌는데, 신청도 어렵고 진행은 투명히 공개가 안 된다. 관련 컨설팅까지 성행하는 상황이다.
양용현=신·구 산업 이해갈등이 생기면 '타다' 사례처럼 법을 만들어 못 하게 막기까지 한다. 기업에 실패 경험이 축적되고 있다. 공무원의 위험 회피 탓이 크다. 잘못되면 행정감사 등 책임을 진다는 생각에 운신의 폭이 좁고, 규제 개혁은 잘 안 된다.
-네거티브 규제 전환 주장도 제기돼 왔다.
최성진=법률 해석, 특정 산업 관련 법 개정 시엔 네거티브 방식을 고려해 부분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화장품이 수출 효자로 성장한 이유 중 하나가 예외적으로 '네거티브 리스트'를 도입, 사용하면 안 되는 원료를 규정해 실험의 폭을 넓힌 덕이란 점을 고려할 만하다.
이재훈=드론을 날릴 수 없는 곳만 규정하든, 날릴 수 있는 곳만 규정하든 결국 소관 부처 공무원이 해당 여부를 인정해야 하기에 여기서 병목 현상이 발생한다. 공무원 책임 문제를 해소하지 않는 한 네거티브 규제를 도입해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양준석=네거티브 전환, 사후 통제 강화가 필요하다. 사전 통제론 사고 발생 시 기업이 '법·규제가 요구하는 걸 다 했다'고 하면 책임을 묻기 힘들다. 미국 등은 일이 벌어지면 기업이 사고를 예측하고 피할 수 있었는지 등을 살펴 철저히 책임지게 한다. 법제에 반영 안 된 사항도 기업이 자진해 신경 쓰게 된다.
정부도 문제점을 인식, 개선을 추진 중이다. 국무조정실은 지난 1일 민간 중심 신산업규제혁신위원회 기능 확대를 통한 이해관계 조정, 선제적 과제 발굴 후 사업자를 모집해 특례를 부여하는 '기획형 규제 샌드박스' 등을 담은 '규제 샌드박스 개선방안'을 내놨다. 기대와 함께 효과에 대한 의구심도 나온다.
-규제 샌드박스,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원소연=운영지침 신설, 데이터 통합관리·투명화 등은 긍정적 변화이나 규제 샌드박스가 더 난립하지 않도록 제한하고, 국조실 총괄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현재는 전담 인력도 없어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 첨예한 이해관계 사안을 민간 위원회 권고로 규제특례위원회에서 의결하는 방안의 효용엔 회의적이다. 소관 부처가 반대하면 결국 제도가 개선될 수 없어 운용의 묘가 필요하다.
곽노성=혁신은 위험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난제를 풀기 위해 실험해야 할 것은 다 부가 조건으로 못 하게 하니 특례가 끝나도 결론이 안 난다. 실증특례가 다 끝나고 법령 정비 불가 사유를 위원회에서 입증케 하는 현 개선방안은 실효성이 없다. 국민 권리를 제한하는 규제의 필요·완화 여부 입증 책임을 특례 설계 단계부터 공무원에게 두고, 검증 요건과 부가 조건을 명확히 해야 한다.
최성진=실증특례 기간(최장 4~6년)을 단축해야 한다. 안 되면 빨리 접을 수라도 있어야 하는데, 규제를 풀어 줄 것처럼 '기다려 보라'고 하다 희망고문이 된다. 규제 개선 논의 자리에 소비자 목소리가 배제되는 것도 문제다. 직역 갈등에선 조직된 소수 목소리가 더 잘 반영된다. 정부가 변화 방향을 분명히 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양쪽 의견이 달라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는 혁신할 수 없다. 다만 기존 산업도 변화에 적응할 기회를 주고, 신산업 부가가치를 통해 상생 방안을 마련해 주는 식으로 가야 한다.
이재훈='기획형 규제 샌드박스'가 부처 실적주의로 운영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부처가 개선 필요성을 이미 인식하는 규제를 샌드박스를 통해 바꾸는 건 제도의 기본 철학과 맞지 않다. 특정 기업에 규제를 풀어주는 장이 될 특혜 제공 소지도 염려된다.
양용현=일단 규제 샌드박스로 보내 임시 허용할 뿐, 정작 제도 개선 비율은 낮아 본질이 왜곡된 측면이 있다. 규제 샌드박스 결과와 제도 개선을 연계하는 체계를 명시적으로 규정해야 한다. 갑작스러운 규제 완화가 부담스럽다면 단계적으로 푸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