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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경제] “인적 역량과 공정한 시스템 뒷받침돼야 경제 동력 다시 살아날 수 있어”
 
2024-03-06 11:06:23
1990~2000년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해 전설적인 투수로 남은 톰 글래빈. 평균 140km/h대의 빠르지 않은 구속에도 역대 메이저리그 선발투수 중 퀄리티스타트 1위를 기록한 그는 ‘열혈 야구팬’ 박재완 경제교육단체협의회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다. “야구에 대한 나의 열정은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긴 톰 글래빈은 철저한 상대팀 분석과 자기관리로 자신의 단점을 극복했다. 끊임없이 역량을 업데이트해 가고 있는 박재완 경제교육단체협의회 회장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고용노동부·기획재정부 장관을 역임하고, 대학·경제교육단체협의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의 인적 역량을 높이기 위한 역할을 활발하게 펼치는 박재완 회장을 만나 한국경제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2011~2013년 기획재정부 장관 재임 당시와 비교해 2024년의 경제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2008~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 극복 과정에서 재정지출을 늘리고 세금을 감면하는 등 유동성이 크게 늘었습니다. 그 부작용 때문에 물가를 잡고 동시에 일자리를 확보해야 하는 어려운 때였지만, 지금이 더 힘든 상황인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유동성을 풀었던 전 세계가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고금리 여진으로 구매력이 약화하고 이와 함께 건설투자가 위축하는 등 내수가 부진합니다. 또 글로벌 교역의 분절화로 원화가 약세(고환율)인데도 수출 회복세가 더뎌 경기가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더 큰 문제는 저성장 기조가 고착할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성장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요?
첫째, ‘인구배당(생산가능인구 비율이 상승해 부양률이 감소하고 경제성장이 촉진되는 현상)’ 희석, 1인가구 급증, 고령화 등 인구위험 가속, 둘째, 탐구·모험·창의·문제해결 등 혁신 역량 정체, 셋째, 사회갈등 고조와 자조 의식 퇴색, 넷째, 더딘 디지털 전환·진화로 인한 제조업 비교우위 약화와 서비스업 생산성 낙후 및 신산업 태동 지체, 다섯째, 과도한 화석연료 의존과 낮은 탄소 생산성(탄소배출량 대비 산출량), 여섯째, 근본 원인 해결보다는 대증 요법이 횡행하면서 기여와 보상이 동떨어진 불공정한 시스템 확산 등 구조적인 문제점이 수두룩합니다. 이런 문제들이 근원적으로 경제 동력을 훼손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복합적·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부민안국(富民安國)의 필요조건인 인적 역량 제고와 충분조건인 공정한 시스템 구축이 절실합니다. 경제활동의 자유와 기회를 확대하고, 자율·분권·다양성을 진작하며 개방·공유·창의를 고취해 혁신을 촉진하고, 유인·책무를 강화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는 구조개혁에 집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편 가르기와 대중영합정치를 극복해 ‘큰 정부’ 유산과 ‘보모(保姆)국가’ 기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밖에 공교육의 자율·다양성·책임 복원, 노동시장의 역동성·투명성 제고와 노사자치 확립, 지속 가능한 복지 구축과 재정규율 확립, 기득권을 깨는 규제개혁과 전문서비스업 선진화, 디지털 전환 가속화, 가족 가치 고양도 절실하다고 봅니다.

국가 총부채 비율이 지난해 6월 말 기준 GDP 대비 273.1%이며, 특히 2천조 원이 넘는 가계부채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최근 가계부채가 소득·자산보다 더 빠르게 늘어나 그 증가 폭이 선진국 최고 수준입니다. 특히 다중 채무가 있는 개인사업자가 급증하고 연체율이 상승하는 추세입니다. 기업부채도 가파르게 늘고, 운전자금 비중이 높아져 그 쓰임새의 질 역시 나빠지면서 한계기업 비율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지름길은 없습니다. 최선의 경로는 금리 수준을 웃도는 성장률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시스템 위기와 경착륙을 피하기 위한 경제안정에 유의하면서 긴 호흡으로 생산성 향상을 통한 일자리 창출과 소득 증대에 힘써야 합니다. 아울러 부채에 쉽게 의존하는 인식에 경종을 울리는 한편 금융권의 담보 의존 관행을 줄이고 상환 능력 심사를 과학화해야 합니다.

과학기술 분야 등 미래를 위한 투자 소요는 많은데 세수는 부족한 상황입니다. 이 균형을 어떻게 맞춰갈 수 있을까요?
재정건전성은 세대 간 약속이자 규율이고 미래에 대한 투자입니다. 코로나19 기간 중 재정지출이 너무 늘었고, 또 국채 이자와 복지지출 등 의무지출 비율도 꾸준히 상승했습니다. 의무지출 비율이 지금처럼 상승하면 재정건전성 확립이 더욱 어려워지는 만큼 지방교육재정교부금과 복지지출 등의 구조조정을 서둘러야 합니다. 당장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정부 역할을 줄이고 민간의 자율·분권·창의를 북돋아야 경제 활력을 복원하고 세입 기반도 확충할 수 있습니다. 민관 협력이 불가피한 경제안보 분야를 제외하면, 정부는 민간의 역량과 다양성을 인정해 개입을 줄이고 균등한 기회 보장과 공정한 질서 확립에 주력해야 합니다.

태영건설의 워크아웃 개시 결의로 한숨 돌렸지만,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은 여전히 큰 이슈입니다.
부동산 PF 부실은 부동산 경기 침체가 촉발했으나, 근원적으로는 위험을 분산할 다양한 자본 조달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국내 부동산 시행사들은 자금력이 취약해 토지매입비부터 브릿지론(제2금융권 차입금)에 기대고 공사비도 분양대금 의존도가 높아 본PF대출이 시공사의 신용 위주로 진행됩니다. 시행사가 견실한 자기 자본과 다양한 투자자에 힘입어 토지를 확보하고 공사비만 PF대출로 조달하는 선진국과 대조적입니다. 최근 불거진 PF 부실에 대해선 자기책임 원칙이 훼손되지 않도록 관리하되, 양호한 사업장까지 위험이 전이되지 않도록 적기에 유동성을 공급해야 합니다. 장기적으론 시공사의 신용보다 프로젝트의 현금 흐름을 담보로 하는 구조로 PF대출을 개선해야 합니다. 시행사의 자본요건을 강화하고, 다양한 재무적 투자자를 확충하며, 주거용 부동산은 선분양 비율과 중도금 비중을 줄여나가야 할 것입니다.

교육·노동·연금 3대 개혁이 성공하려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삶이 윤택하고 편안한 나라가 되려면 인적 역량을 끌어올리고, 기여와 보상이 부합하는 공정한 시스템을 갖춰야 합니다. 교육개혁은 인적 역량 향상에 필수입니다. 인적 역량이 정체되면 생산성 향상과 신산업 태동에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한편 연금·노동 개혁은 공정한 시스템 구축과 직결됩니다. 현 연금제도는 미래세대와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오히려 불리한 측면이 있습니다. 지금의 노동법제와 만연한 노동계 관행은 대기업의 정규직·전일제 근로자와 노조원에 유리하고 비정규직·구직자·시간제 근로자와 비노조원에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3대 개혁은 하나같이 절실하지만, 특히 연금은 저출생·고령화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기득권층이 늘어나고 피해자는 줄어들어 바로잡기 어려워지므로 당장 개혁이 시급합니다. 다만, 하루아침에 이들을 다 이룰 순 없기에 명확한 청사진과 치밀한 단계적 실행계획을 내놓고, 숙의·공론·창도를 거쳐 공감대를 넓혀나가며 연착륙을 위한 절충·합의를 모색하는 슬기로운 일머리(statecraft)가 절실합니다.

최근 급속한 저출생·고령화로 우리나라의 성장잠재력이 약화하고 있습니다. 인구구조 측면의 성장잠재력 진단과 함께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인구배당’이 희석되면서 잠재성장률이 꾸준히 내려가고 있습니다. 노동의 성장 기여도는 조만간 마이너스로 바뀔 전망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선진국 중 젊은 편에 속하지만 30년 후 가장 늙은 나라가 되며 사회보장비 급증, 공적 연금 수지 악화, 의료비 부담 가중 및 생산성 하락을 경험할 것입니다. 생산가능인구가 정점을 찍었던 2014년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이, 같은 상황이던 2008년 미국의 60%에 그친 데 비춰보면 인구위험이 너무 빨리 닥쳤습니다. 비혼주의와 1인가구 급증 추이도 우려됩니다. 절박한 인식으로 전방위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경제적 유인 외에도 가부장제 등 낡은 문화의 청산과 함께 가족의 가치를 고양하는 교육·캠페인 등의 병행이 절실합니다. 미국의 백인가구 순자산은 흑인가구보다 8배나 많으나, 백인 1인가구 순자산은 흑인 유배우자 가구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이는 가족이 근로 의욕, 저축 동기, 책임·자조 의식 함양에 결정적 요인이란 방증입니다. 가족이 있으면 끼니를 거르거나 음주·흡연·도박·마약에 빠질 확률도 낮습니다.

AI 등으로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불안도 있습니다.
AI 등 기술 발전이 기존 일자리 상당수를 잠식하거나 대체하겠지만, 생산성을 끌어올려 소득과 여가를 늘리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순기능이 더 클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산업혁명 이후 진전된 다양한 혁신, 기계화와 자동화는 일자리와 여가 확충에 이바지했습니다. 디지털 대전환에 적응할 수 있도록 평생 학습을 통해 역량을 계속 갱신해야 합니다. 또한 ‘100세 시대’와 ‘대중(crowd) 자본주의’ 도래에 대비해 합리적인 자산 운용법을 익혀 누구든 근로자와 자본가 두 속성을 함께 갖춰나가야 합니다.

청소년이 시장의 힘을 알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시장의 힘을 제대로 아는 시민’이란 무엇인가요?
가계·기업·국가 경제력은 구성원의 경제 인식·역량·노력이 결정짓습니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몸에 배 넉넉한 삶을 영위하는 유대인 사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경제 수준에 비해 시장경제, 특히 공정한 시스템에 관한 인식이 미흡합니다. 나이 들어서도 부모의 도움을 바라고, 연고에 기대거나, 노력과 창의보다 불로소득이나 요행을 바라는 한탕 심리와 과시 소비에 따른 거품이 상당합니다. 어려서부터 직업의식과 근로 윤리, 기업가정신과 혁신, 상생의 노사관계, 상도의와 신용, 슬기로운 소비, 미래 대비 연금·저축·투자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잠재력과 소질을 계발해 미래를 탐색하고 자립심을 고취해 스스로 삶을 개척하도록 독려하는 한편 공동체 정신도 함양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경제교육단체협의회에서는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는 학습자 중심의 맞춤형 디지털 콘텐츠를 개발·보급해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고자 합니다.

1990년 12월 창간한 『나라경제』가 400호를 맞이했습니다.
우선 400호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나라경제』에는 국민소득 1만 달러 달성(1995년)과 외환위기(1997년)를 비롯해 대한민국 현대 경제사의 명암이 녹아 있습니다. 그동안 『나라경제』는 우리 경제의 좌표를 알리는 등불이자 침로를 밝히는 나침반으로 경제에 관한 정론을 이끌어왔습니다. 여러 해를 거듭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라경제』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나라가 사분오열돼 갈등이 심각합니다. 남녀·노사·세대 간 갈등에 교사와 학부모 다툼까지 가세했습니다. 정쟁과 편 가르기, 거짓과 위선, 사기와 무고,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정체성 집단주의’가 심화하고 노력보다 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급증했습니다. 느슨한 기초질서, 희박한 공민의식, 허술한 직업윤리, 얄팍한 상술 등도 문제입니다. 공감·소통·협업 등 포용 역량의 확충이 절실합니다. 또 존중·통합의 협치와 숙의·공론·창도 문화를 진작하고 시민의식을 함양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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