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지식인 사회] [下] 보수우파, 통합을 모색하다
"이념 대립만 하다간 선진국 못된다"
보수, 진보 껴안아 사회 통합 추구
"산업화·민주화 세력 함께 오늘의 대한민국 만들어…
서로 경쟁하며 공존 노력… 합리적 정책대결 벌일 것"
'국민 통합' '진보와 보수의 공생'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소통'….
지난 1일 보수 지식인 그룹인 사단법인 시대정신의 '2009 송년의 밤' 행사에선 '소통'과 '통합'이 화두였다. 안병직 이사장은 "지금은 정말 어려운 시대다. 진보와 보수가 통합이 되어야 민주주의가 된다. 국민 통합을 위해 진보와 함께 공생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동안 '통합' '소통'은 진보 좌파가 보수 우파를 공격할 때 자주 애용하던 용어였다. '꼴통' 보수세력이 완고한 성채처럼 군림하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진보 좌파의 비판에 보수 우파 진영은 수세에 몰리기 일쑤였다. 지난해 광우병 촛불시위 때 일부 시위대는 "정부는 소통에 나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보수 우파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진보와 보수의 '통합'을 말하고 있다. 최근 출간된 보수 우파 진영의 계간지 〈시대정신〉이 '국민 통합'이란 주제로 특집 좌담과 논문을 실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 특집은 산업화 세력(보수 우파)과 민주화 세력(진보 좌파)이 갈등만 해온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통합의 역사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세중 연세대 교수는 "한국현대사의 주요 갈등 당사자였던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상보적(相補的) 관계 속에서 사회 발전에 불가결한 구성 분자로서 기능해 왔다는 역사 인식은 한국 사회의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실천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이념과 생각을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었던 보수 우파는 최근 자신들의 배타성을 성찰적 태도로 비판하고 있다. 중도 보수 진영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한반도선진화재단이 지난해 말 개최한 '한국의 보수를 말한다' 심포지엄에 참석한 보수 지식인들은 "그동안 보수가 국민에게 변화를 기피하는 집단으로 인식된 것은 보수 스스로 자초한 결과"라고 질타했다.
대표적인 뉴라이트 지식인 중 한 사람인 고(故)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는 이 자리에서 "한국의 보수가 위기에 빠진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와 촛불집회, 노무현 정부 5년의 '대못'이라는 외부적 요인보다도 보수 전체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한국의 보수는 철학적 원칙도 없고, 사회 통합을 달성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없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김문조 고려대 교수는 "한국의 보수는 결정적 국면마다 대의를 위한 자기 희생적 자세를 견지하지 못하고 장막 뒤로 은둔했다"며 "그로 인해 진보 집단과 비교해 도덕적 우위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사회 통합의 지도력을 약화시켰다"고 지적했다.
보수의 '통합' 모색은 뉴라이트 진영에 국한된 현상만은 아니다. 1954년 '아시아민족반공연맹'으로 출발한 자유총연맹도 '국민 통합'을 주요 활동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보수단체 총본산' '원조 보수'를 자임하고 있는 자유총연맹은 2년 전 진보단체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와 함께 '화합과 상생의 국민 통합 토론회'를 개최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 전복세력' '간첩'으로 보던 사람들을 한자리에 앉아 대화하고 소통하는 상대로 인정한 것이다.
이처럼 보수가 '통합' '소통'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의 극심한 이념 대립이 비효율과 낭비를 초래하고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들어서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홍진표 시대정신 이사는 "상대를 체제 밖으로 내모는 '배제의 논리'는 과거 산업화시대에는 필요악의 측면이 있었지만, 이제는 대한민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수 지식인들이 자각하게 된 것"이라며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인정한다는 전제하에 진보와 보수가 서로 경쟁하며 공존하는 것은 선진국으로 가는 조건"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이 이룬 성취에 대한 자신감도 작용했다.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서울대 교수)은 "대한민국은 산업화를 통해 기아의 고통에서 벗어났고, 민주화를 통해 독재와 억압의 고통에서 벗어난 세계의 모범국가"라며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값진 가치와 소중한 경험을 바탕으로 진보와 보수가 힘을 모아 대한민국 선진화라는 대장정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이제 보수 우파와 진보 좌파가 한자리에 앉아 머리를 맞대는 모습은 새로운 풍경이 아니다. 한반도선진화재단은 지난해부터 진보 성향의 '좋은정책포럼'과 잇달아 공동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있고, 시대정신도 진보 성향 지식인들과 함께하는 토론회를 열고 있다. 홍진표 시대정신 이사는 "처음에는 참가자 섭외조차 안 될 정도였지만 조금씩 신뢰가 쌓이면서 진보와 보수 내부에서 서로 만나야 할 필요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9년 보수 우파는 진보 좌파와 함께 공존하고 경쟁하면서 선진 대한민국으로 가는 길로 힘찬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이한수 기자 hslee@chosun.com
♤ 이 글은 2009년 12월 26일 [조선일보]에 실린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