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은 박세일, 오바마는 최장집
[안병진의 '오바마와 미국']<3> 철학적 기반으로 평가해 본 취임 100일
[프레시안] 2009년 04월 30일(목) 오후 02:06
[프레시안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현재 미국에서는 취임 100일이 된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평가의 계절을 맞고 있다. 이념을 떠나 미국 지식계와 시민들 대다수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보수 일각에서는 소위 불량국가 지도자들에게 대통령이 너무 유화적이라는 불만이 존재하지만 그간 인사 조치나 소말리아 해적 진압 등 일련의 위기 대처를 지켜보며 그 누구도 그가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이는 과거 선거 기간 초선 상원의원으로서 상원 규칙도 아직 못 익힌 애송이로 보는 시각에서 180도 전환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시민들도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놀랍게도 5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평가를 하고 있어 부정적 평가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높은 평가에는 다소 거품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평가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즉 전임 정권인 부시 행정부의 실패가 워낙 두드러져 그만큼 오바마 정부에 대한 기대나 평가가 후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사실 전임 정권과의 비교는 별로 유익한 평가의 틀이 아니다. 흔히 언론에서는 오바마 정부를 부시 행정부와 비교해 다자주의적이고 외교적이라는 평가를 많이 한다. 하지만 이는 부시는 공화당이고 오바마는 민주당이라는 이야기만큼이나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일 뿐 오바마 정부의 활동양식을 정교하게 평가하거나 예측하는 것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바마 행정부 기간 내내 클린턴이나 케네디 정부처럼 유사한 자유주의적 기질의 대통령들과 비교를 염두에 두고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관찰해야 보다 정교한 인식이 가능해질 것이다.
클린턴과 박세일, 그리고 노무현
100일 평가의 계절을 맞이해 필자는 오바마 행정부의 현재와 미래의 금고를 열기 위한 하나의 비밀번호로 한국의 두 탁월한 석학을 떠올리고자 한다. 즉, 진보의 석학인 최장집 교수와 보수의 석학인 박세일 교수는 각각 오바마와 클린턴 정부를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일 수 있다.
클린턴과 박세일의 조합? 미국 민주당 대통령인 클린턴 정부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로 보수 이론가인 박세일 교수라는 표현은 어색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박 교수는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철학을 통해 MB정부를 이루고 있는 천민보수 세력과 다른 합리적 보수를 추구하는 학자 아닌가? 그의 비전이 시장과 북한 문제에 대한 태도에서 기존 보수주의와의 차이가 얼마나 단절적인가는 논쟁의 소지가 있지만 한국의 일그러진 천민보수 우위의 구도에서 그의 시도가 신선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한국의 민주당 정부인 노무현 정부에 대해 매우 날선 비판을 해왔다.
하지만 필자는 겉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박세일의 사유방식의 골간은 노무현 대통령과 다소 유사하다는 것을 과거 몇 년간 수차례 강조해왔다. 둘 간의 가장 핵심적인 공통점은 시장근본주의적 질서에 대한 환상 속에서 그 질서가 가져오는 부작용을 공동체주의적 통합을 통해 보완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노대통령은 집권 후반기에 공동체주의적 통합이라는 화두에 큰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미 집권 전부터 한국의 공동체 자유주의의 원조격인 미국의 공동체주의 철학과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집권 전후로 그의 비전에 중요하게 관여한 저명한 공동체주의 철학자 에치오니가 그 연결의 핵심이다. 그는 이후 클린턴이 가장 애착을 보인 아젠다인 아메리코어(전국적 자원봉사 조직) 창설을 주도했다.
공동체주의를 초기에 정립할 때 에치오니 교수는 매우 솔직하게 자신의 철학은 경제 구조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안병진, 2007) 이는 70년대 이후 시장근본주의 이념인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며 민주당을 새로이 재편한 클린턴, 고어 등의 신(新)민주당론자들의 문제의식과도 잘 통하는 이념이었다.
물론 클린턴 행정부에도 공동체주의보다는 더 진보적 함의를 가지는 공화주의 철학자 벤자민 바버 같은 이도 참여한 적이 있었지만 이는 잠시 장식품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클린턴 정부의 국내노선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로 박세일 교수 경향의 공동체주의를 지적하는 것이다.
반면 여기서 말하는 바버의 공화주의란 주로 진보적으로 해석된 것을 말한다. 이는 사회의 견제와 균형이 일그러진 상태를 인정한 속에서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공동체주의의 도덕주의보다 더 진보적인 함의를 가진다.
이들은 자유로운 공화국이 부패하지 않기 위해 실질적 견제와 균형, 시민공동체의 동등성을 유지하기 위한 법에 의한 지배, 풀뿌리 시민적 활력의 유지 등을 매우 중시한다.(안병진, 2009)
한국에서도 노무현 정부는 클린턴 대통령이 벤자민 바버에게 그러했듯 진보적 석학들에게 잠시 자문을 구하기도 했지만 흔히 보수신문에 알려진 것과 달리 서로 간에는 여러 측면에서 물과 기름 같은 요소가 많았다.
단적인 경우가 바로 최장집 교수였다. 비록 그는 바버와 달리 공화주의에 대한 호감을 철회했지만 필자는 여전히 여러 측면에서 그를 진보적 공화주의자와 친화성을 가진다고 본다. 그는 시장근본주의 질서를 자연적 질서로 본 에치오니와 달리 시장에 대한 철저한 규제 및 노동의 힘 강화를 통해 견제와 균형의 질서를 일관되게 주창해왔다. 그리고 갈등을 나쁜 것으로만 터부시하는 한국의 풍토에서 갈등의 생산적 역할을 강조한 그의 관점은 마키아벨리 경향의 진보적 공화주의 문제의식과도 수렴된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박세일 교수를 선택했다. 아이러니는 노 대통령이 사실상 박세일 교수의 문제의식으로 갈수록 근접해가면서도 박 교수를 비롯한 보수진영 전체로부터는 이와 반비례해 철저히 외면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포퓰리즘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테오도르 루즈벨트나 로널드 레이건처럼 보수의 가장 탁월한 대통령들은 모두 포퓰리스트다)이나 이념의 안경을 벗고 학문적 냉정함으로 노무현 정부를 돌이켜본다면 자신들의 사유방식과 근접하는 부분이 생각보다는 굉장히 많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링컨-케네디-오바마로 이어지는 공화주의 전통
오바마 대통령은 클린턴이 에치오니를 필요로 했던 것처럼 철학자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시카고대학의 저명한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자 선스타인을 백악관 규제 담당 지휘자로 배치해 그의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선스타인의 역할은 클린턴에게 에치오니와 같은 비중의 것은 아니다.
미국의 민주당 대통령은 거칠게 나누자면 두 경향으로 분류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나는 뼛속까지 실용주의로 무장한 대통령이고 다른 하나는 실용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인 대통령이다.
'뺀질이'로 불린 클린턴이나 심지어 민주당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전자의 흐름으로서 철학적 문제의식은 약하다. 그들이 여러 정책 옵션들 사이에서 자주 갈팡질팡했던 것도 어쩌면 이와 연관되어 있는지 모른다. 반면에 링컨이나 케네디는 공화주의적 철학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하다. 오바마는 후자의 흐름에 속한다.
오바마의 국내 노선은 민주공화국 복원을 위한 견제와 균형의 강화라는 공화주의적 문제의식을 이해할 때만이 비로소 전체적인 윤곽이 파악될 수 있다. 필자는 2008년 미국 대선 과정에서 그가 무조건적 조국애가 아니라 민주공화국 전통에 대한 사랑에 기초한 공화주의적 애국주의 철학을 구현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안병진, 2008)
그는 집권 이후에도 시장질서 내 견제력의 회복, 노동 힘의 강화, 사회적 갈등을 은폐하지 않고 이를 드러내고 쟁투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갈등적 합의'의 정신, 사회적 힘에 기반을 둔 민주당 구축 등을 통해 일관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 점에서 현재의 오바마 정부는 바버보다 에치오니에 기울어진 클린턴 정부나 최장집 교수의 고언에 냉담하게 반응한 노무현 정부와 달리 어느 정도는 최장집 교수라는 키워드로 포착이 가능하다.
물론 과연 오바마 정부의 공화주의적 기조가 얼마나 일관됐는지는 논란의 소지가 많다. 예를 들어 가이트너 재무장관 등 그의 핵심 경제팀들은 규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자일수는 있어도 철저히 견제와 균형의 회복을 추구하는 공화주의적 경제팀이라고는 말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메디슨 등 미국의 건국의 시조이자 미국 공화주의의 선구자는 견제와 균형 전반에 대한 탁월한 비전을 가졌지만 시장 질서를 역동적 균형으로 만들어내는 공화주의적 경제관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이 약하다는 치명적 한계를 가진다.
오바마가 이제 겨우 시작인 취임 100일 넘어 향후 4년 내지 8년간 미국의 근본적 활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 점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할 것이다.
MB 진영은 철학 부재, 야권은 철학과 인물 부재
최근 한국정치에서도 성적 채점의 계절이 돌아온 것 같다.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MB 진영은 침통하고 성공한 민주당과 진보신당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하지만 MB 진영은 겨우 몇 석의 선거에서 패배한 것보다 더 큰 악몽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들이 한국 사회의 견제와 균형을 극심히 일그러뜨리며 결국 이는 자신 정치세력의 파산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들에게 정작 선거 패배보다 더 큰 위기는 보수적 공화주의 내지는 공동체주의 철학의 내면화가 부재하다는 것에 있다.
반면 야권들은 몇 석은 건졌지만 정작 그들 전반이 합의할 수 있는 진보적 공화주의의 비전과 이를 혼과 메시지, 스타일로 구현하는 대중적 정치인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허전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미국이나 한국이나 문제의 근원은 철학에 있는 것이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 anotherway@pressi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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