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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영수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 Ⅰ. 경제성장 과정에서의 통상정책
우리나라의 통상정책은 60년대에는 수출 주도 성장전략을 해외일선에서 뒷받침하는 대임을 맡기 시작하였으며 70년대와 80년대에는 선진국의 견제와 수입규제 등 통상압력을 막아내고 국익을 지키는데 전력투구 하였다. 80년대 후반 이후에는 미국․EU등의 시장개방 압력이 본격화 되어 우리 경제·무역제도의 선진화를 추진하면서도 국내적으로는 성장동력(가전, 철강, 조선 등)을 키우고 취약산업(금융, 농수산 등)에 대한 유예기간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국과 개방속도를 조절하는데 부심하였다. 또한 미개척시장에서 플랜트 수출, 대형공사의 수주, 해외투자 및 자원개발을 지원하느라 혼신을 다한 통상담당 공무원들의 노고도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90년대 이후 우리 통상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 후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우리의 제1무역․투자협력 대상이 되었다. OECD 가입은 우리 경제제도의 선진화와 개방을 가속화 시키면서 ‘개방형 통상국가’를 지향하도록 하였지만, IMF 경제위기와 맞물리면서 외국인 투자가 통상협력의 중요한 부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OECD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된 도하라운드협상에서 우리는 더 이상 개도국이 아닌 입장에서, 선진국과의 공조(대개도국공세)와 대개도국 협력 사이에서 국익을 확보해야 하는 고도의 통상전략이 필요하게 되었다.
한편, ‘FTA 지각생’에서 벗어나기 위해 2000년대 들어서 정부가 시작한 ‘동시다발적 FTA 추진’은 우리 경제의 전면적인 글로벌화를 앞당기는 한편 통상협력의 지역구도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또한 1998년「통상교섭본부」의 발족을 계기로 변모된 추진체계는 글로벌경제시대의 통상정책의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야할 시대적 소명을 띠고 있다.
통상협력과 통상정책에 대한 긍정적 평가 못지않게 부정적인 면 또는 개선·보완이 필요한 부분도 작지 않다. 따라서 앞으로 통상정책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과거 통상정책의 기조와 활동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Ⅱ. 통상정책 기조에 대한 회고
우리나라는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여 통상정책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해오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국내 경제정책과 국제통상 환경 사이에서 그때그때마다 이들을 적절히 반영하는데 머물렀다. 통상정책도 경제정책의 한 부분으로서 국정 목표의 하부구조를 담당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통상정책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어 국정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고 그 이행을 주도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통상정책은 항상 다른 국정목표에 이끌리는 종속변수이기만 했지 경제(국가)의 선진화를 주도하진 못했다.
그간의 통상정책 방향·목표의 변화는 시대의 큰 흐름으로 보면 불가피했고 또한 타당한 면도 있다. 그러나 정책의 변화는 항시 시기와 속도의 적절성, 기존제도 및 타부문과의 균형성, 실현가능성, 대외적 신뢰유지를 위한 정책의 일관성 등이 신중히, 종합적으로 고려되어 추진되어야 한다. 그러한 면에서 보면 우리의 통상정책 방향은 긍정적인 측면 못지않게 반성해야 할 점도 많다고 본다.
우선 시장개방과 통상정책의 일관성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통상정책은 수출 진흥이라는 지상목표에 부응하여 충실히 대외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고도성장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수출확대와 국내산업 육성이라는 목표달성을 위해 좀 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일관된 통상정책의 원칙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국제무역규범(GATT등)상 특혜가 주어진 ‘개도국 지위’를 슬기롭게 활용한 면도 있으나 경제규모나 발전정도에 걸맞지 않는 대내외 규제의 잔존, 그리고 국제적 기준과 시각으로 보아 인정되지 않거나 오해의 소지가 큰 보호주적 제도와 행태가 대외적 신뢰를 손상시키고 경제의 선진화에 걸림돌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통상정책은 우리나라를 국제무역질서 형성에 수동적인 동조자로서만 참여하는데 머무르게 하였다. 우리나라가 이러한 기조에서 탈피하여 적극적인 통상정책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우루과이라운드협상 참여, 더 정확히는 OECD 가입(가입시기와 가입조건 협상에 관한 논란은 논외로 하더라도)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의 통상정책이 긴 안목에서 통상이익을 추구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늬만 개방’이 아닌 진정한 개방을 통해 선진화된 경제제도를 갖추고 외국의 신뢰를 기반으로 협력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향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이루어야 하며, 필요한 경우 고도의 정치지도력을 발휘하여 정책적 결단을 내려야한다.
통상정책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통상정책의 외생변수이자 통상정책에 내재화 되는 중요한 요인들(factors)로서 몇 가지 국정목표와 방향들에 대해서도 반성할 필요가 있다.
우선, ‘세계화’의 추진(1994)은 취지와 방향에서는 타당했으나 너무 서둘렀고 과욕이 앞섰다. 60년대 이후 압축·고도 성장과정에서 후유증으로 남겨진 ‘한국병’을 치유하고 ‘업그레이드’ 시킨다는 것이 취지였지만 합리성을 근거로 한 구체적 실행계획이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정치적 구호가 앞선 나머지 우리 경제수준을 넘어선 ‘과잉 세계화’의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OECD에의 가입(1997)은 우리나라가 선진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할 절차였다. 그러나 OECD 가입과 IMF 외환위기의 발생의 시기적인 일치는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이나 전 현직 경제 관료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외환위기의 주원인이 OECD 가입자체는 아닐지라도 OECD 가입 시기 및 가입 조건과 관련한 상황인식과 판단에 있어서 금융정책 당국이 좀 더 정밀하고 신중했어야 했다.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 건설’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공약이자 노무현 정부(참여정부)의 주요 국정과제로서 2003년 초 정부출범 시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듯했다. 그러나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 개념의 혼란과 우선순위에 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구체적 실행보다는 계획(로드맵)과 토론, 형식(위원회)에 치중했으며 허황된 과욕이 앞섰다. 또한 여기에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사회의 지역 또는 집단 이기주의가 가세하였고, 각 부처의 부처이기주의와 과대홍보 및 전시행정, 학계 및 언론의 균형을 잃은 주장과 보도 등으로 금융․물류뿐만 아니라 교육, 의료, 문화․예술분야에 까지 광범위하게 ‘거품’이 끼었으며 국민들의 ‘허브착시’ 현상을 부추겼다.
Ⅲ. 선진화를 위한 통상정책의 방향
가. 경제정책을 선도하는 적극적인 통상정책의 지향
과거에는 통상정책이 다른 경제정책의 종속변수로서 이끌려 왔지만 이제는 통상정책이 경제정책 전반, 나가서는 국정전반을 선진화시키는 데 앞장서야 할 때다.
오늘날 세계경제의 큰 흐름중 하나는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하는 다자주의적 자유무역주의와 함께, 세계 도처에서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이름으로 경제의 블록화가 경쟁적으로 벌어지고 있어 각국의 국내경제가 세계경제 또는 지역경제로 빠른 속도로 통합되고 있는 현상이다. 세계 경제.사회의 글로벌화가 가속화 되는 가운데 우리나라 경제의 대외 의존도 또한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지향해야 할 통상정책의 방향은 무엇인가? 세계경제로의 통합이라는 시대적 조류에 단순히 편승할 것인가, 아니면 한 발짝 아니 반 발짝만이라도 앞서 갈 것이가? 대답은 명확하다. 앞서 가야한다. 그 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의욕만 앞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앞서 가되 구체적 실행이 따라야 한다. 또한 그 앞서가는 것을 통상정책이 주도해야한다.
아직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못 미치는 많은 국내 제도․관행․의식을 개선하고 대외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데 있어서 통상정책이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때 마침 신정부가 과감한 규제완화와 비즈니스 환경 개선을 추진할 예정인 바 이는 적극적인 통상정책과도 부합한다.
통상정책은 대외협상 뿐만 아니라 국내 이해계층과의 ‘대내협상’, 필요하다면 악역도 맡을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통상정책이 단순한 대외통상적 시각에 바탕을 둔 대외협상 뿐만 아니라 폭 넓은 산업정책 나가서는 경제·사회 전반을 포괄하는 정책적 시각을 견지하고 국가의 총체적 선진화를 조율·감시·독려하는 역할까지도 수행해야 한다.
나. 선진통상국가를 위한 정치적 리더쉽의 강화
통상정책은 경제정책 중에서도 의견조정이 가장 어려운 분야이다. 왜냐하면 국내 이해관계 조정뿐만 아니라 외국과 상반된 이해의 조정을 거쳐야 하는, 고도의 정책결정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통상담당 공무원들은 대외협상 이전에 국내 이해관계 조정에 힘을 소진할 정도로 국내 정책조정의 대상은 민감하고 중요한 사안이다. 따라서 주무부처 장관은 말 할 것도 없고 기획재정부 장관(대외경제장관회의 의장)이나 통상교섭 본부장(대외 경제실무조정회의 의장)이 정책조정의 책임을 모두 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쌀 개방, FTA 추진 등 통상현안은 고도의 정치적 이슈이며 정치적 결단과 리더쉽이 필요한 사안들이다. 따라서 정책결정의 중요한 고비, 고비에서 대통령이 정책조정과 여론 설득에 직접 나서서 추진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 비난이나 정치적 부담을 피하려다 보면 그에 따른 국가적 비효율과 손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또한 국회의원을 위시한 정치권도 이제 정치적 이해득실 보다는 국가적 관점에서 장기적인 국익을 고려하는 소신 있는 정치 행태를 보여주어야 한다. 개인 소신이 지역정서와 다를 때 지역주민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한편 합리적인 대안을 발굴하여 정부에 제시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미 FTA에 대한 비준안에 대해 정치권은 소신있는 태도와 결단을 보여주고 필요하다면 미국 의회와 적극적인 의원외교도 전개해야 한다.
다. 장기적 통상 목표 수립과 다변적·다원적 통상외교 전개
먼저, 국가경제의 백년대계를 결정할 FTA 추진에 관한 문제이다. 2000년 이후 정부가 ‘동시 다발적인’ FTA를 서둘러 추진함으로서 그간의 ‘통상외톨이’를 면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자유무역협정(FTA)은 일단 체결되면 과거로 되돌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만큼 일국(특히 상대적 소국의 경우 더욱)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고 항구적이다.
그러므로 FTA 추진 대상국 선정, 영향평가, 의견수렴 절차, 협상전략 수립, 사후대책 시행 등 모든 절차가 국가의 장기적 통상전략의 관점에서 시작되고 끝나야 한다. 적극적이되 치밀하고 신중해야 한다. 정부가 FTA 추진을 위한 ‘밑그림’ (「FTA로드맵」, 2004)에 근거하여 제반 절차를 밟고 있다고는 하나 로드맵의 완성도나 실행의 충실도 면에서 아직은 미흡한 감이 있고 즉흥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서두르는 면도 없지 않아 보인다. FTA 추진 선언이나 의견수렴 절차 등이 정치적 이벤트성으로 이루어져선 안된다.
다음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익의 극대화를 위한 대외 경제.통상 관계의 다변적, 다원적인 추진 문제이다. 우선 미국과의 관계를 보면, 과거 지나친 대미 경제.무역 의존과 무역 불균형의 심화가 통상마찰의 근본원인이기도 하였지만 대표적 선진시장인 미국시장에서의 경쟁력 약화는 또 다른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FTA를 계기로 한 새로운 통상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일본의 비중과 일본에 대한 관심이 중국에 밀려 지나칠 정도로 낮아지고 있다는 것도 문제이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 일본과의 무역비중의 급격한 저하는 최근 세계적 추세인 경제의 지역적 통합 경향에 비추어 재고되어야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욱 문제인 것은 무역 불균형은 오히려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일 FTA협상의 재개는 농산물의 양허 폭 뿐만 아니라 FTA가 무역 불균형 개선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 ‘FTA효과’(무역창출효과 및 무역전환효과)가 양국 간 무역을 확대균형의 방향으로 수렴시킬 수 있을지를 종합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
한편, 최근 27개국으로 확대된, 세계최대의 경제블럭인 EU와의 경제·무역 확대를 위한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과거에 EU측은 우리나라의 ‘대미 편향적 사고’에 대한 불만을 종종 표출하기도 한 만큼 (예: 1995 한․미 자동차협상 시) 현재 진행 중인 한-EU FTA를 계기로 EU와 관계 강화를 위한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중국에 대하여는 장기적인 산업구조적 차원에서 상생적 분업협력 방안을 모색하되 한-중 FTA는 매우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대중국 무역흑자(대미흑자의 두배 이상)에 대하여는 과거 대미흑자 관리에 기울인 정도 이상의 배려를 통해 통상분쟁을 최대한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한편 최근 수년간 과거에 비해 정부의 관심과 노력이 저하된 감이 있는 자원.에너지 외교를 신정부가 다시 강화하려는 것은 늦었지만 다행한 일인 바, 걸프지역등 자원.에너지 보유국들은 물론 러시아, 인도, 브라질, 남아공 등 잠재 유망시장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다양한 경제.통상협력 수단을 동원하고 필요하다면 정상외교도 적극 전개해야 한다. 그러나 정상외교를 위시한 각종 대외 행사는 전시효과와 형식에 치중하기 보다는 성과와 내실, 그리고 ‘비용효과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라. 통상정책의 효율성과 민주성의 조화
우리나라에서는 그간 사회, 정치문제화 되었던 많은 통상이슈들(쌀 개방협상, 한중 마늘 분쟁 및 합의서 공개문제, 한․칠레 FTA 체결 및 비준 등)의 경우 충분한 의견수렴과 정책의 투명성 확보가 미흡하여 대외협상의 타결을 어렵게 하거나 협상의 후유증을 많이 남기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는 통상정책의 ‘민주성’과 ‘효율성’의 문제이기도 한데 양자를 모두 완벽하게 구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최선의 조화가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통상정책을 의회가 주도하는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의회의 대 행정부 통제 및 협의체제가 미국 등에 비해 법적으로나 관행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지 못하다. 정책추진의 신속성과 효율성이 민주성에 비해 더 강조되어온 우리의 전통적인 경제정책 추진 풍토 하에서 통상정책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회는 외국과의 협정체결에 대한 비준권한을 갖고 있지만 사후적인 동의 못지않게 사전협의도 중요하다. 사전협의 과정을 통해 국회의원들도 통상현안에 대해 연구하고 이해를 넓혀 국가전체적인 관점에서 정부의 통상정책의 방향을 올바르게 이끌고 필요할 경우 통상협상의 추진을 적극지원하고 여론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
관련 업계와의 사전협의나 협상과정에서의 의견조율도 충분치 못하다. 통상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정부는 업계를 소집하여 소규모 회의를 개최하고 있으나 참석자들의 ‘대표성’이 확보되지 않고 예고기간도 짧아 충분한 의견 수렴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형식상「민간자문위원회」, 또는「실무 작업반」(working groups)이 운영되고 있으나 실질적인 의견수렴 과정이라기보다는 협상진행 동향과 정부의 입장을 알리고 의견 수렴의 ‘형식’을 갖추는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통상정책은 국회, 업계, NGO 등 모든 이해 집단간의 압력과 견제 등 상호작용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므로 정책결정 과정의 투명성과 다원성은 수립되는 정책의 객관성과 지지도를 높이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비록 어렵더라도 정책의 투명성을 높이고 다양한 의견을 최대한 수렴, 반영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통상절차의 투명성은 FTA 추진과 관련하여 특히 문제가 되었는데 한·칠레 FTA와 한미 FTA 모두 공식 협상 개시 전에 충분한 국내 의견수렴 과정이 없이 정부의 일방적인 선언(정상회담 등)에 의해 급하게 추진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국과는 달리 대외통상정책의 기조가 공세적일 수 없는, 그리고 통상정책에 대한 의회-행정부의 역학관계가 미국과는 다른 우리나라가 미국과 동일한 형태의 통상절차법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렇다하더라도 우리의 여건에 맞는 ‘통상절차법’의 제정을 통해 효율성 못지않게 중요한 통상 절차의 민주성을 확보하고 국민적 합의에 바탕을 둔 원활한 개방 대책 등을 추진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더 바람직하다.
또한 협상전략적 측면에서, 미국이 그러하듯(반덤핑제도 의제화 반대, Trade Promotion Authority 등을 빙자한 협상 강공, 주정부의 바이아메리칸 정책 불관여 등), 우리에게도 국회 또는 여론수렴 절차가 대외 통상 대응 또는 통상 공세에 있어서 ‘방패막이’ 또는 ‘공격무기’가 될 수도 있다. 다만, 이러한 ‘통상절차법’이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기보다는 정부의 합리적인 정책 수립과 전략적인 협상을 더 어렵게 하고 비효율을 초래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마. 통상협력 추진 조직과 체계의 보강
통상교섭본부의 출범은 우리나라의 통상정책과 통상업무 추진체계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원칙적으로 모든 통상협상을 통상교섭본부가 주도함으로써 협상주도권을 둘러싼 부처 간 다툼을 없애고, 외교정책까지 고려한 전략적인 견지에서 통상정책을 수립하고 협상을 추진하며, 해외공관을 활용한 정보입수와 대응을 가능케 하고 통상의 전문성을 확보한다는 것이 조직개편의 본래 취지였다. 지난 10년간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나름대로의 노력과 성과가 있었긴 하지만 문제점들이 근치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행 통상교섭본부의 근본적 단점은(많은 노력과 제도 보완에도 불구하고) 통상기능과 산업기능의 분리로 기술적, 전문적 사안에 대한 통상교섭본부의 교섭기능에 한계가 있고 업계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고 업계를 설득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산업과 통상의 연계성이 강한 일본의 경우 경제산업성의 통상기능은 과거 통상산업성 시절 보다 오히려 강화된 면이 있음을 참고하여 산업별 통상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부처 간 통상정책 조정 메커니즘은 통상교섭본부 설립이후 외형상 다소의 변화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USTR이 대외 교섭과 대내 조정을 모두 주도하는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통상교섭본부 설립이후에도 대외 교섭은 외교통상부(통상교섭본부)가, 대내 조정은 기획재정부가 주관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하위 단계의 실무급 조정주체(대외 경제 실무조정 회의 의장)를 통상교섭 본부장이 맡음으로써 대외 교섭과 대내 정책조정을 연계시키는데 다소 효율성이 높아진 면은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평소 경제정책 전반의 조정업무를 관장하는 기획재정부에 비해 통상교섭본부는 관련부처와 업무연계성이나 조정 네트워크가 미흡하기 때문에 통상교섭 본부장의 정책조정은 용이치 않다.
통상전문 인력은 가장중요한 통상인프라이다. 예전처럼 각 부처에 통상교섭권이 분산되어 있을 때에 비해 통상교섭본부 출범이후에는 통상전담 인력을 양성 할 수 있는 여건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통상교섭본부에서도 해외 공관근무 등 순환보직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어 전문성과 책임감을 확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또한 외교통상부 내에서 정무분야가 통상 분야 보다 선호되는 현실에서 우수한 중간간부 인력이 통상 분야에 장기근속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인사 상 우대 및 전문 인력의 충원대책이 강화되어야 한다.
각 부처는 경쟁적으로 해외주재관을 파견하고 있어 사실상 거의 모든 부처가 해외주재관을 두고 있으나 과연 국가자원의 적정한 활용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문시된다. 한편, 외교관이 아닌 일반 부처 주재관의 경우 외교직에 비해 하위 직명을 부여받고 있어 각 부처 주재관이 주재국 정부와 업무 협의 시 불리한 대우를 받고 있다. 이는 다른 나라의 예와 비교해볼 때 시급히 개선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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