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un Brief 통권320호
17일간 전 세계를 환하게 밝혔던 2024 파리올림픽의 성화가 지난 12일(한국시간) 꺼졌다. 금메달 13개-은메달 9개-동메달 10개. 21개 종목 144명의 선수가 일군 성적은 풍성했다. 1976 몬트리올대회 이후 48년 만에 최소 인원으로 꾸린 소수정예 멤버는 기대치를 훌쩍 뛰어넘는 종합 순위 8위로 대회를 마쳤다. 2008 베이징 대회, 2012 런던 대회에서 기록한 올림픽 최다 금메달 타이의 호성적. 성적은 합격점이었지만 배드민턴 여자 단식 금메달을 목에 건 안세영(22·삼성생명)이 대한배드민턴협회(회장 김택규)를 향해 쏘아붙인 작심발언은 국민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타자(他者)와의 대결에 집중하고 승리만을 스포츠의 유일한 가치로 치부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분명 스포츠는 글로벌 시대에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중층적 모순구조로 극심한 갈등에 휩싸인 한국에서 사회적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유용한 콘텐츠임에 분명하다. 그만큼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담지하는 콘텐츠인 만큼 국민들의 눈높이와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 과거의 체육 패러다임은 변해야 마땅하다. 다른 분야에 견줘 변화가 더딘 조직문화가 지배하는 체육계의 개혁은 안세영이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부터 차근차근 시작해야 한다는 게 체육을 사랑하는 뜻있는 분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1. 10년의 암흑기 속에 퇴행하는 체육단체 시스템의 문제
체육의 지난 10년은 암흑기나 다름없었다. 최순실의 체육 농단으로 쑥대밭이 된 체육계는 문재인 정권에선 더욱 황폐해졌다. 체육의 가치를 폄훼하고 과잉 신념으로 한국 체육의 본령인 엘리트 체육의 폐해를 침소봉대하는 정책적 실패로 체육은 숫제 거덜이 났기 때문이다. 결국 체육은 정치적 과오와 정책적 실패로 지난 10년간 암흑의 터널에서 허우적댔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도 모자랄 판에 무려 10년을 퇴행한 체육계였던 만큼 어쩌면 안세영 선수의 작심발언은 개혁의 트리거로 많은 점을 시사했다. 그는 ▲대한배드민턴협회의 불통 ▲선수관리 시스템 ▲시대착오적인 대표팀 규정 등을 문제 삼으며 ▲개인 스폰서십 확대 등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안세영의 협회 비판은 배드민턴에 국한된 비판이라기보다는 찬찬히 뜯어보면 종목 단체의 보편적인 문제점이라는 지적이다. 결론은 선수를 위한 종목 단체의 시스템 변화로 모아지며 이는 곧 한국 체육계에 남겨진 숙제라는 평이다.
체육의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 유인촌 장관이 지난 12일 정례 브리핑에서 “지금이 체육정책을 새롭게 다듬고 개혁하는 적기”라고 밝힌 것도 그런 맥락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동안 한국 체육은 선수가 주인인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었다. 종목단체를 장악한 임원들이 자신들의 배타적 권력을 행사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돼 온 게 사실이다. 시대에 뒤처진 시스템이 고착화된 결정적 이유는 체육계에 만연된 포퓰리즘 탓이라는 게 필자의 확신이다. 한국 체육의 물적토대는 사실상 공적 재원인 기금과 국고로 운영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눈먼 돈을 소진시키는 데 집중돼 있는 시스템이 바로 한국 체육의 고질적 문제다. 선수는 뒷전이며 권력을 장악한 임원들이 보조금을 해당 종목의 발전을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들의 배타적 권력 향유에 쓰거나 더 나아가 배임과 횡령이라는 범죄까지 저지르곤 한다. 임원의 권력 행사가 아니라 선수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이 앞으로 한국 체육이 지향해야 하는 바람직한 체육 시스템이다. 선수들이 경기력을 끌어올리고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하며 과학적 프로그램을 지원받는데 쓰여야 할 재원이 임원들의 권력 충족에 쓰여지는 건 이젠 국민들의 눈높이와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 일이다. 특히 미래 사회의 중심축인 MZ세대는 정당한 권리에 대한 부당한 침해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겐 임원 중심의 권력 행사형 체육단체 시스템은 이해하기 힘든 구시대 시스템일 뿐이다. 선수 중심의 그리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이 향후 체육단체의 바람직한 패러다임 시프트다.
2. 건강한 체육 생태계의 핵심은 다양성
한국 체육은 불행했다. 체육이 늘 수단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근대 체육의 도입기는 일제 강점기였고 따라서 체육은 민족적 울분을 표출하는 유용한 기제로 적극 활용됐다. 해방 후 압축 성장기에는 체육이 국가 위상 제고, 즉 체제 경쟁의 도구로 적극 기능했다. 체육 국가주의(state amateurism)로 불린 이러한 체육정책은 엘리트 체육을 집중육성하면서 개인이 추구할 수 있는 다양한 체육의 가치가 무시되고 사장되는 큰 아픔을 겪었다. 개인 위에 군림하는 국가가 추구하는 이익에 체육은 군소리 없이 복무해야 하는 엄숙주의는 체육이 지닌 다양성을 황폐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체육인들은 국익에 철저히 복무해야 하는 수단으로서만 기능했다. 국가 위상을 드높이는 경기력 중심의 체육 가치만 높이 평가받으면서 한국 체육은 질곡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댔다. 선수들은 국가 브랜드를 고양하는 도구로서 기능함으로써 자아실현과 행복추구라는 체육의 본연의 가치보다 성적의 노예로 전락하는 또 다른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순과 갈등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폭발하고 있는 게 작금의 체육계 현실이다. 그렇다고 엘리트 체육을 버리자는 게 아니다. 다양한 체육, 즉 엘리트체육과 학교체육 그리고 생활체육이 한데 아우러지며 선순환하는 체육 생태계의 구축이 필요하다. 쏠림이 없는 균형이 잡힌 체육 생태계에서 국민들은 생애주기별 체육활동에 참여하는 게 일상화되어야 한다. 생활과 밀착된 체육, 그래야 체육이 바로 설 수 있다.
3. 체육개혁은 스리트랙(three track)으로 완성해야 하는 험난한 길
체육개혁은 왜 그리 더딜까. 폭력과 같은 인권침해와 각종 부정 비리가 난무하는 체육계의 부끄러운 민낯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숱한 개혁작업이 기대치에 밑도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 사회에서 체육의 가치가 여전히 변방에 머물고 있고 체육이 삶과 유리된 채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체육은 선수들만이 하는 특수한 분야로 용인되는 사회적 풍토는 고질적 문제다.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체육은 지식습득에 밀려나고 치열한 대학입시 탓에 체육은 운동선수의 전유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체육정책 역시 전체 학생 700여만 명의 1%에 불과한 7만여 명의 운동선수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99%의 학생들의 체육활동 참가에 방점을 찍은 체육정책은 온데간데 없이 운동선수에 대한 규제와 관리가 사실상의 한국 체육정책의 근간인 것은 따져볼 문제다. 정책의 생명은 보편성이지만 1%의 특수한 집단에 대한 정책이 보편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의 체육정책은 체육활동에서 사실상 배제된 학생들을 어떻게 적극적인 체육활동에 참여시키는 게 핵심이다. ‘공부하는 운동선수’와 함께 ‘운동하는 학생’이라는 이상적인 현실을 만든 뒤 이러한 교육환경에서 길러진 사람들이 체육계로 들어와 선진적인 체육행정을 담당해야 체육개혁은 완성될 수 있다. 일단 각종 부정과 비리에 대한 강력한 제재로 개혁의 신호탄을 쏘는 게 첫 번째 트랙이라면 두 번째 트랙은 새로운 우물을 파야 한다. 새로운 환경에 맞는 정책과 제도 변화의 과정이다. 그리고 마지막 스리트랙은 ‘공부하는 운동선수’와 ‘운동하는 학생’들이 새로운 우물에 마중물로 들어와 행정을 펼치는 게 체육개혁의 마지막 퍼즐인 셈이다. 이 스리트랙(three track) 개혁은 최소한 한 세대(one-generation)가 걸리는 호흡 긴 과정임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4. 자생력을 기르는 물적 토대
체육계의 갈등과 분쟁을 파고들면 결국은 돈의 문제로 귀결된다. 갈등과 분쟁이 자주 생기는 종목단체는 결국 돈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체육계는 물적 토대가 빈약하다. 한국 체육은 사실상 대부분이 국가와 지자체의 공적 재원에 의존하기 때문에 재정자립도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공적 재원은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자생력을 떨어뜨려 조직의 건전성을 훼손하고 발전의 장애물이 되곤 한다. 다양한 마케팅을 통해 조직의 물적 토대를 탄탄하게 만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노력없이 주어지는 외부의 지원으로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자생의지는 싹을 틔울 수 없다. 배타적 특권세력이 주어진 자원을 문제의식 없이 소비하면서 갈등과 분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들은 맛있게 차려놓은 밥상을 게걸스럽게 먹는데에만 신경을 쓴다. 충성도가 높고 헌신적인 경기인들이 봉사하기 위해 체육행정에 뛰어드는 것을 막는 조직 문화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구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게 바로 작금의 체육현실이라면 정부나 지자체는 체육단체의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매칭펀드 시스템을 적극 도입하는 것도 적극 고려해 보아야 한다.
5. 체육의 가치와 몸의 철학이 이끄는 한국 사회의 질적 도약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객관적 사실과 보편적 가치마저 부정되는 시대가 돼버렸다는 게 아닐까 싶다. 이유는 자명하다. 사람들이 머리로만 사유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교육과정에서 소위 성공한 지식인들이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발견되는 결정적 흠결이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지식과 기술을 머리로만 사유하고 몸으로 터득하는 걸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이들은 자신만이 옳다는 독단과 편견에 빠지기 쉽다. 이게 바로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큰 문제점이다. 몸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몸으로 터득하는 경험과 진리에 둔감하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에 길들여진 정치인이나 오피니언 리더들은 머리로 사유하고 입으로 살아가는 데만 익숙해져 있다.
앎과 삶의 불일치는 결국 갈등의 심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파와 진영의 논리에 매몰된 정치판에서 ‘내로남불’ 현상은 일상이 됐고, 이것은 결국 앎과 삶의 불일치가 원인이라는 게 필자의 확신이다. 몸으로 터득하는 삶이 머리로 사유하는 앎과 괴리가 생길 때 ‘내로남불’은 심화되고 고착될 수밖에 없다.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정치인들이 자신을 성찰하기보다 타인을 향해 가시돋친 말 화살을 쏘아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치열한 삶과 유리된 앎의 세상에서만 표류했기 때문이다.
몸은 타자(他者)와 소통하는 창구다. 내 스스로가 다른 사람은 물론 사물 및 현상과 맺는 관계성은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네트워크가 바로 몸의 존재 이유인 셈이다. 타협과 중재 그리고 협상이 싹트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어떤가? 지식의 습득을 교육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몸의 가치와 철학을 터득하는 체육은 지식교육에 밀려 정규 교육과정에서조차 배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한국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지식교육에 몰입하느라 체육활동에 거리를 뒀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교육 패러다임의 전복(顚覆)일지도 모른다. 지(智)-덕(德)-체(體) 패러다임에서 체(體)-덕(德)-지(智) 패러다임으로 전환, 한국 사회가 질적 도약을 꾀하기 위해 반드시 던져야 하는 승부수가 아닐까. 머리와 말만 능한 사람들이 가슴과 행동이 발달된 사람들로 바뀌면 한국 사회도 새롭게 변할 수 있다. 말에는 힘이 없지만 행동에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체육과 몸의 철학에 내재한 위대한 가치다. 이게 바로 한국 체육이 응시하고 나아가야 할 길이다.
※ 본고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