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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un Brief [영웅을 기리며: 백선엽 장군을 위한 '역사적 사실'을 밝힌다] 통권145호
 
2020-07-17 16: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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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un Brief 통권145호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다른 인물도 아닌, 대한민국 광복회장 김원웅 씨가 서거한 백선엽 장군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 그의 주장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면 별 문제가 없겠으나, 그 발언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허위·기만·사기다.

김원웅 씨가 지난 71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을 본토로 소환하라는 서한 중에는 백선엽 장군을 일제 강점기에 민족을 배반하고 우리 독립군을 학살한 자”, “일제 시 전범국가 일본에 빌붙어 수많은 독립군과 조선민중을 학살했고, 2차 세계대전 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아시아의 하인리히 힘러라고 망언을 했다.

김원웅 씨를 비롯하여 백 장군을 친일 매국노로 폄훼하는 세력들의 주장을 분석해 보면 백선엽 장군은 만주군 장교 출신이며, 간도특설대에 소속되어, 우리의 항일무장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런 전력을 가진 인물이니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추적해 보면 이들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사기 날조 거짓으로 도배질 되어 있어 일일이 거론할 만한 가치조차 없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차원에서 위의 세 가지 주장에 대한 사실 관계를 밝힌다.

 

1. 만주군 장교 출신이면 모두 친일파인가?

만주국이 군관학교를 개교한 것은 19334월이다. 봉천에 2년제 군관학교를 개설하고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일제 치하의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뜻을 펴지 못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젊은 인재들이 신천지로 떠오른 만주국에서 장교가 되기 위해 만주로 모여들었다.

조선 청년들이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하여 만주군 장교로 임관할 수 있게 된 것은 당시 관동군에 소속되어 있었던 홍사익의 노력 덕분이다. 홍사익은 육군 중좌 시절 만주군관학교 초대 군사고문, 교육담당 고문으로 재직하며 만주군관학교 후보생 모집 자격에 조선계포함을 명문화했다.

 

홍사익은 일제 치하에서 일본 육군사관학교(26)를 졸업하고, 군 최고 수재들만 들어갈 수 있는 육군대학을 거쳐 일본 육군 중장에까지 오른 엘리트였다. 조선의 왕족 출신이 아닌, 일반인이 육군 중장까지 승진한 사례는 홍사익이 유일하다. 만주에서 오래 근무했던 홍사익에 대해 춘원 이광수는 재만(在滿)동포 간에 애경(愛敬)을 받았다는 글을 남긴 바 있다. 정일권이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했을 때 홍사익은 조선인 출신 후보생들과의 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조선 출신 여러분. 여러분을 충심으로 환영한다. 여러분에게 거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여기서 할 일은 지극히 간단명료하다.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배워라.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이 모든 것을 모조리 먹어치워라. 언젠가는 실력 발휘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정일권, 정일권 회고록, 고려서적, 1996).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조선이 독립하면 국군을 건설해야 한다. 그때를 대비하여 누에가 뽕잎 갉아먹듯이모든 것을 배웠고, 해방 후 건국이 되었을 때 대한민국 국군의 주역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데 목숨 바친 그들을 단순히 친일파란 용어로 매도할 수 있는가?

 

홍사익 장군은 태평양전쟁 말기, 필리핀 포로수용소장 겸 필리핀 방면군 병참감에 임명됐다. 임지로 떠나기 전 홍사익은 마이니치신문에 근무하던 김을한 기자와 만나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김을한: 필리핀으로 가지 말고 중경 임시정부로 가서 장군의 육사 동기 이청천 씨가 총사령관으로 있는 광복군에 가입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홍사익: 이번에 가는 길이 죽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김을한: 일본군에 대한 의리 때문인가?

홍사익: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다. 지금 한국 사람이 수십만이나 전쟁에 동원되었는데 최고 지위에 있다는 내가 만일 배신을 한다면 병사들은 물론 징용된 노무자들까지 보복을 받을 것이므로 나만을 생각해서 그런 경솔한 짓은 할 수 없다.(김을한, 여기 참사람이 있다, 신태양사, 1960)

 

홍사익 장군이 필리핀 근무 도중 일본이 항복했다. 그는 연합군 포로들을 학대한 혐의로 도쿄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당했다.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홍사익 장군의 처형이라는 책에서 홍사익 장군이 사형선고를 받으면서도 구차스러운 변명 한 마디 없이 옛 부하들이 저지른 포로 학대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조용히 최후를 마친 그 거룩한 모습을 흠모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도쿄 재판에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한 일본인 A급 전범들이 볼꼴 사납게 추태부린 것에 비하면, 이 얼마나 위의(威儀)당당한 최후였던가. (중략) 장군은 일본 군인으로서 죽은 것이 아니라 조선의 무인정신으로써 조국에 바치는 마지막 봉사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처럼 절절한 심정이 어디 홍사익 장군 한 사람 뿐이었겠는가?

 

2. 간도특설대가 조선의 항일무장 독립군을 토벌했나?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을 출범시키자 중국공산당은 산하에 동북항일연군이란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여 관동군 및 만주군을 공격했다. 토벌 과정에서 체포된 빨치산을 심문한 결과 거의 대부분이 만주로 이주해 온 한국인이었다. 중국공산당은 불쌍한 한국인을 공산당에 끌어들여 그들에게 총을 쥐어주고 일·만군을 공격토록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을 구사한 것이다.

만주국은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 19393월 간도특설대를 조직하여 빨치산 토벌 임무를 맡겼다. 간도특설대는 하사관과 사병은 전원 한국인, 장교는 한국인·일본인이 절반씩 섞인 한국인 위주의 부대였다.

나라 잃은 후 입신출세를 꿈꾸며 만주로 달려간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은 한쪽에선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동북항일연군 빨치산이 되었고, 다른 쪽에선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일본·만주군에 소속되어 빨치산과 싸웠다. 만주벌판에서 한국인들이 편이 갈려 중공과 일제를 대리한 동족상잔의 피 흘리는 전투를 자행한 것이다.

 

양측 모두 외세를 등에 업고 동족에 총부리를 겨누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쪽은 영웅, 다른 쪽은 악마로 매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만주군 편에 섰던 자들이 친일파 민족반역자면, 중공 쪽에 섰던 동북항일연군 빨치산들은 친중파 민족반역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 아닌가?

또 한 가지 따질 문제가 있다. 간도특설대가 토벌한 대상은 만주 일대에서 준동하던 중국공산당 산하의 동북항일연군이었다. 그 대원 중에 한국인들도 있었는데 그들 거의 대부분은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중국인이었다.

동북항일연군의 활동목표와 행동강령은 반만항일(反滿抗日)로 동북실지(東北失地)의 회복, 중화(中華) 조국의 옹호, 일적(日賊) 주구의 재산 몰수, 민중과 연합하여 항일구중국(抗日救中國)이라고 명문화 되어 있다(만주국 군정부 고문부 편, 만주공산비적의 연구, 신경(新京) 군정부, 1937).

 

미안하고 안 된 이야기지만,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한국인 빨치산들은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다. 그들은 중국 국적자로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 지도부의 명령을 받아 중국의 독립과 해방, 잃어버린 만주(동북)를 회복하고, 중화 조국을 옹호하기 위해 투쟁한 것일 뿐이다. 이런 집단을 조선 독립군으로 우기는 것은 역사적 사실의 날조다.

 

또 한 가지 살펴야 할 일이 있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배치된 시기는 19432월이었다. 만주국은 1939101일부터 19413월 말까지 8만여 대병력을 동원하여 만주 일대에서 공산 빨치산 격멸을 위한 동남33개년 치안숙정(肅正)공작을 전개했다. 관동군 소속 노조에 쇼토쿠(野副昌德) 소장의 지휘 하에 토벌군은 만주 전역을 빗질하듯 토벌하여 동북항일연군 빨치산 부대를 궤멸시켰다.

중국공산당은 생존해 있는 대원들에게 소련령으로의 도주를 명령했다. 그 결과 194012월부터 19413월 사이 생존한 기백 명의 빨치산들이 소-만 국경을 넘어 소련령으로 도주했다. 노조에 토벌대는 1941319일 빨치산 토벌 승리를 위한 축하연을 개최했다(서대숙 지음·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25~26).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배치되었을 무렵 만주 일대에는 동북항일연군은 완전 궤멸되었고 마적질, 비적질이나 일삼는 화적떼들만 남아 있었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소탕한 것은 마적질, 비적질 하던 도적떼를 소탕한 것이지 조선독립군을 때려잡은 것이 아니다.

 

3. 조선의 항일무장 독립군을 토벌한 자들은 누구인가?

조선의 항일무장 독립군을 토벌한 자들은 소련 공산당과, 그들에게 기생했던 한국인 공산주의자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었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에서 대승을 거둔 한국의 항일무장 독립군 3,500여 명은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연해주의 이만(달네레첸스크)으로 이동했다.

소련의 레닌 정부는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일본군의 철군을 위해 일본과 비밀 협약을 맺는다. 일본군은 시베리아 철수 조건으로 한국 무장독립군의 처리를 요청했다. 레닌 정부가 이 요구를 수락하여 한국의 항일무장 독립군을 자유시로 명명된 알렉세예프스크로 유인했다.

 

1921628일 소련 적군과 공산당을 추종하던 한국인 무장부대가 청산리·봉오동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한국의 항일무장 독립군을 학살했다. 수백 명이 사살되었고, 탈출을 위해 강으로 뛰어든 수많은 대원이 익사했다. 1,000여 명은 포로가 되어 볼셰비키 혁명군으로 강제 징집되었다. 청산리·봉오동의 빛나는 승리를 기록한 한국의 전정한 항일무장 독립군 세력은 이로 인해 몰살 해체되었다.

1937년 스탈린은 소련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간첩행위를 막기 위해 한국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주는 193811일까지 완료되었는데, 이주 과정에서 25,000여 명이 사망했고, 강제이주 직전 지도자급 한국인 2,500명을 반역죄로 처형했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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