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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비핵 선언과 9·19 합의 이미 파탄 났다
 
2022-10-26 10:07:59

◆ 이용준 전 외교부 북핵대사는 한반도선진화재단 대외정책연구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용준 前 외교부 북핵대사

연초부터 잊을 만하면 각종 미사일을 동서로 쏘아대던 북한은 최근 들어 일본열도 너머로 중거리미사일을 발사했다. 이어 잠수함발사미사일과 장거리순항미사일을 발사하고 전투기 150대 비행훈련을 발표하는 등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급기야 지난주엔 9·19 남북군사합의에 규정된 완충해역에 밤낮으로 수백 발의 포사격을 하는 등 광기 어린 도발을 했다.

북한이 김일성 시대 이래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미국의 군사적 위협도 제재 조치도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잊어지는 일이다. 북한은 정치체제의 속성상 자급자족이 불가능하고 다른 나라들이 북한의 위협에 굴복해 뇌물이나 원조를 제공해야 생존할 수 있는 착취지향형 집단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무장 역시 한국과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정치적 양보와 경제적 대가를 받아내기 위한 협박 수단이었다. 그러나 핵 위협을 통해 제재 해제와 경제 원조를 얻어내려던 북한의 노력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북한은 지난 5년간 혹독한 제재 조치를 가까스로 견뎌 왔으나, 국제사회의 관심이 온통 미·중 패권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쏠려 북한의 존재는 잊히고 있다. 그러자 국제사회를 향해 ‘나 좀 쳐다봐 달라’고 벌이는 군사 도발은 앞이 안 보이는 존망의 갈림길에 선 북한이 내지르는 비명과도 같다. 북한은 핵무장만 완성하면 대미 수교, 남조선 흡수통일 등 모든 꿈을 단번에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했겠지만, 오히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이 직면한 망국의 위기와도 닮았다.

북한이 최근 일련의 도발을 통해 9·19 남북군사합의를 노골적으로 파기한 만큼, 이제 공은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이 합의는 비무장지대 감시초소 철수와 휴전선 인근의 군사훈련 금지, 공중정찰 금지, 한강하구 개방 등 우리 군의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는 조치들로 가득 차 있으나, 정작 한반도 평화의 최대 걸림돌인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다. 북한이 이 합의를 먼저 파기함에 따라, 이제 우리 앞에는 이 불평등하고 위험한 합의를 정당하게 폐기할 절호의 기회가 열렸다. 그 선택은 순전히 우리 정부의 몫이다.

남북한은 1991년 핵 보유를 금지한 남북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했으나, 북한은 비핵화 약속을 파기하고 6차례 핵실험까지 했다. 그런데도 한국은 이 합의를 지금도 홀로 준수하고 있다. 북한이 1994년의 미·북 제네바 합의를 위반하고 비밀 핵 개발을 계속하자, 2003년 제네바 합의 폐기와 더불어 북한 신포에서의 경수로 공사도 중단됐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그 후 2년간 홀로 경수로 공사 재개에 집착한 결과 4000만 달러의 추가 공사비만 날렸다.


이런 명분도 실리도 없는 우매한 선례를 재차 반복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유에서든 9·19 군사합의를 당장 폐기하기 어려운 사정이라면 북한이 7차 핵실험을 실시할 경우 9·19 군사합의 폐기, 비핵화 공동선언 폐기, 한·미 미사일방어(MD) 협력, 사드(THAAD) 추가 배치 등 우리의 안보를 위한 대응 조치를 할 것임을 사전에 명확히 천명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의 미래 행동에 대한 명분을 축적하고 중국의 대북(對北) 압력 행사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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