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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차분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
 
2021-06-25 13:30:21
◆ 박재완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의 칼럼입니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창시자 앨프리드 마셜은 1885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로 취임하며 ‘머리가 차분하면서도 가슴은 따뜻한’ 인재를 키우겠노라 다짐했다. 둘 중 한쪽이 모자라면 무모하거나 교만해진다. 최근의 기본소득 논쟁을 봐도 그렇다.


기본소득은 경기지사의 간판 대선 공약이다. 모든 이에게 정부가 매월 정액을 주겠다고 한다. 자신이 성남시장 때 퍼뜨린 청년 배당과 지난해 앞장서 주장한 재난지원금의 확대판이다. 군소정당인 기본소득당과 시대전환도 기본소득을 당론으로 내세운다.

반면 서울시장과 유승민 전 의원은 기본소득이 가난을 역차별한다며 대안으로 안심소득과 공정소득을 내놨다. 저소득층에겐 수입과 기준소득 격차를 메꿔주자는 거다. 이 둘은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밀턴 프리드먼 미국 시카고대 교수가 구상한 하후상박식 ‘마이너스 소득세’에 가깝다. 고위 경제관료 출신 다섯 명도 얼마 전 펴낸 책에서 마이너스 소득세를 지지했다. 다른 대선 주자들도 기본소득에 비판적이다. 전직 총리들은 가성비가 낮거나 불공정하다고 꼬집고, 제주지사는 무책임한 선동이라며 나무란다.

경기지사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재작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매사추세츠공대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교수의 책을 인용해 기본소득을 거듭 옹호했다. 이후 저자 진의가 곡해됐다는 야권의 반박과 문의가 잇따르자 바네르지는 “나라마다 상황이 달라 정답은 없다”고 밝혔다. 어정쩡한 일단락이다. 한편 22일(현지시간) 투표가 끝난 뉴욕시장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대만계 앤드루 양은 빈민에게 월 2000달러의 ‘자유 배당’을 주자고 했다. 앞선 대선 후보 경선 때 자신의 공약(모든 성인에게 월 1000달러씩 배당)에서 한발 물러선 셈이다.

기본소득론 기원은 꽤 오래됐다. 정치철학자 토머스 페인이 1797년 주창한 ‘바닥 지대’가 그 효시다. 그는 가난의 대물림을 막고자 의무교육, 성년(21세) 일시 배당과 50세 이후 연금을 제안했다. 당시는 농경사회라 재원은 토지상속세(10%)로 마련할 작정이었다. 시민소득(1964년 제임스 미드 케임브리지대 교수), 기본소득(1992년 필립 판 파레이스 벨기에 루뱅대 교수)과 참여소득(1996년 앤서니 앳킨슨 런던정경대 교수)은 모두 그 속편이다.

소득·자산·나이나 근로 여부와 무관하게 누구나 정액을 꼬박꼬박 받는 기본소득엔 여러 장점이 있다. 현물이 아닌 현금을 받으니 만족도가 올라가고 행정비용도 절감된다. 자격 검증에 따르는 비용·오류·부패, 복지전달 과정의 낭비·지연이나 낙인효과가 없다. 복지 사각지대나 수급자로 머무르려고 일을 마다하는 ‘빈곤 함정’도 사라진다. 기본소득은 복잡한 선별 복지를 개혁·대체하는 전략으로도 요긴하다.

기본소득을 시행하는 곳은 연 1000~2000달러가량만 지급하는 미 알래스카주뿐이다. 최대 걸림돌은 막대한 재정 소요와 큰 폭의 증세다. 실효를 거두려면 기본소득이 중위소득의 25%는 돼야 한다. 그 경우 선진국은 국내총생산(GDP)의 평균 6.5%, 개도국은 3.75%가 든다(2017년 국제통화기금). 경기지사 복안처럼 월 50만원씩 주려면 연 300조원이 필요하다. 지난해 거둔 소득세의 3.2배, 부가가치세의 4.6배가 넘는다. 세금이 너무 오르면 근로·투자·소비가 위축돼 국민소득이 준다. 1970년대 미국 일부에서 실험해보니 마이너스 소득세는 근로시간을 5% 줄였다. 부자까지 지원하는 건 불공정하다는 반론도 일리가 있다. 기존 복지가 축소되면 저소득층에게 피해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에 관한 최근 연구(2020년 세계은행, 2018~2020년 전미경제연구소, 2019년 영국 경제정책연구소)의 공감대는 네 가지다. 첫째, 대다수가 세금을 내는 선진국에선 근로 유인이 크게 떨어진다. 둘째, 분배 상태가 괜찮은 선진국에선 효과는 작고 재정 소요가 커 차라리 근로장려세제를 넓히거나 선별 복지를 정비하는 게 더 낫다. 셋째, 빈곤층이 많고 복지는 허술하며 소득 정보가 불투명하고 행정 역량이 미흡한 개도국에 유용하다. 넷째, 중산층에 유리하고 미래 세대엔 불리하다.

요컨대 우리는 기본소득을 시행할 단계가 이미 지났다. 그나마 지금의 누더기 복지 제도를 통폐합해 재정 소요라도 확 줄이면 모를까. 그럴 기백과 차분한 머리가 없으면 따뜻한 가슴만 내세워 허세 부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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