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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경제] 90년생 A기자님께
 
2020-07-03 09:50:15

◆ 한반도선진화재단의 후원회원이신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의 건설경제 칼럼입니다.


건설산업의 기본은 주문생산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물건 중에서 고르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만들 사람을 고르는 겁니다. 중매결혼이 성하던 시절에는 신랑의 가문, 용모, 성격 등을 꼼꼼히 챙겨 보고 딸을 시집보냈습니다. 건설고객은 내 물건을 만들 회사의 경험, 기술인들의 역량 그리고 자금은 버틸 만한지 등을 따지게 됩니다. 이걸 흔히 PQ라 하지요.

 같은 주문생산이라도 비행기를 만드는 회사는 세계적으로 몇 안 됩니다. 기술력도 매우 높아야 하지만 사업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일반 건설회사를 만드는 데는 초기 투자가 크지 않습니다. 게다가 수주가 되면 계약과 동시에 선수금도 주니까 단가만 좋으면 하청 주고 남은 돈은 내 돈이라는 계산이 서는 거지요.

 기존의 건설산업은 성숙 단계에 있습니다. 경험 있는 기술인이나 회사들이 시장에 충분히 많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공공건설 입찰의 많은 부분이 기술 변별력이 아니라 가격 싸움으로 가게 됩니다.

 담합이 세금을 축내는 짬짬이 짓이라면, 덤핑은 처음에는 상대방을 죽이는 것 같지만 얼마 후에는 저도 죽어서 결국에는 공급망을 망가뜨립니다. 그런데 정부는 담합은 크게 혼내면서도 덤핑은 못 본  체하고 넘어갑니다.

 ‘제값 주고 제값 받기’는 가고자 하는 방향이지 실현 가능성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의료재단의 설립 목적이 ‘병 없는 세상 만들기’라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정치인들이 선거공약을 다 실천하겠다면 말려야 하는 이유도 그런 거죠. 일만 복잡하게 벌려서 엉뚱한 곳으로 돈이 새어 나갑니다.

 어쨌든 국가 조달의 기본은 최저가입니다. 그러나 시장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한적)최저가’에서 ‘종심제’로, 그리고 중소영세업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간이종심제’까지 도입했습니다.

  요즈음 간이종심제에 대하여 걱정하는 신문 기사가 자주 나옵니다. 응찰자들이 정보 입력란에 회사이름 등을 틀리게 적는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한두 건이 아니니까 기사화했겠죠. 간이종심제는 중소업체들의 입찰 부담을 덜어 주고 공사비도 좀 넉넉히 주자는 취지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회사 이름을 틀리게 적는 회사에 공사를 맡긴다는 건 좀 불안합니다.

 사실 회사 이름 좀 틀렸다고 그 회사가 시공을 잘못할 것이라는 판단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식당을 고르는 것은 주방장의 글솜씨가 아니라 그의 손맛입니다. 그러나 경쟁은 심한데 회사를 한 곳만 고르려니 비생산적인 제도가 운영되는 겁니다.

 발주자 추정금액에 투찰률을 맞히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발주자는 짬짬이를 못하도록 수학의 조합론을 동원합니다. 예가 범위를 +/-2%로 정해놓고 그 범위 내 15개 숫자 중 4개를 무작위로 고르면 천 가지가 넘는 예가율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응찰자는 낙찰률을 높이려고 독심술(讀心術)까지 동원합니다. 새해 첫날 태백산 천제단에 가서 수주기원제를 지내고, 입찰 전날 돼지꿈을 꾼 직원에게 입찰금액을 정하도록 하는 것도 이 제도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지금 우리는 변별력 없는 성숙 시장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방향성을 잃었습니다. 투명성에 올인하다 보니 기술적 변별력은 숨이 막힙니다. 이 산업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발주자가 정해 놓은 금액으로 입찰을 강제하는 지금의 입찰제도는 바뀌어야 합니다.

 기술적으로나 규모적으로 차별화가 어려운 건설공사는 총액만 적어서 입찰하면 정부 조달비용이 줄지 않을까요. 대형 회사들에게는 파이를 크게 잘라 순수내역입찰 방식으로 발주하여 역량을 키워 해외에 나가 경쟁하도록 해야 합니다. 순수내역입찰 제도가 아직도 자리를 못 잡는 이유는 회사들의 견적 능력보다 발주자의 보신적 자세 때문으로 보입니다.

 지금의 건설 조달행정은 에너지 등급으로 치면 4등급도 안 될 겁니다.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엔지니어링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운찰 내역서 만드는 일에 매달려 있는 우리 젊은 기술인들을 현장원가를 제대로 적산하는 기술인으로 키우는 것이 옳은 방향입니다.

 한국판 뉴딜은 ‘토목댐이 아닌 데이터댐’이라는 기사를 보고 말 만드는 기술(?)에 무릎을 쳤습니다. 그러나 토목댐이건 데이터댐이건 그 목적을 분명히 설정해야 경제의 마중물 역할을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마중물은 헛물이 됩니다. 어차피 댐 지을 자리도 별로 없고, 삽자루 잡을 젊은 한국인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일자리가 급한 것은 어느 계층인지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젊은 A기자님과 최저가 제도의 뿌리를 다시 생각해 보자는 뜻에서 이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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