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10 - 새 정부에 바란다>
한반도선진화재단은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새 정부에 바란다] 정책제언을 시리즈로 게재합니다.
이 시리즈에 실리는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1980년대 여러 통상협상에서 수석대표로 미국대표단을 이끌었던 칼라 힐스 미국통상대표(USTR)는 “통상협정은 실상 우리가 아직 만들지 않은 상품에 관한 것”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의 기반이 된 우루과이라운드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과거 물리적 상품에 관한 관세나 비관세장벽을 낮추는 것에서 서비스 무역으로 관심을 돌린 1990년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협정들이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세계 경제 상황과 통상협상의 주요 의제는 그때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또 크게 달라지고 있다.
우선, 미·중 갈등에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반도체, 희토류 등 핵심 전략물자, 곡물, 에너지 등의 글로벌 공급망(GVC)이 혼란에 처한 지 오래되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치솟고 있다. 리쇼어링과 기술 자립, 첨단기술 확보와 핵심 기업 유치 등의 방법으로 글로벌 공급망을 자국 위주로 재편하려는 움직임도 노골적이다. 세계화 과정에서 심화된 상호의존성이 상대방에 대한 공격무기로 동원되는 양상이 펼쳐진다. 냉전 종식 이래 지정학적 요인이 이렇게까지 국제무역체제를 흔든 적은 없었다. 세계 경제와 국제무역 측면에서는 이미 신냉전에 들어선 것 같다. 모두 힘들지만 빈곤한 천연자원에 무역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취약성이 유독 두드러진다. 글로벌 위기와는 별도로 일본과의 소·부·장 갈등, 중국발 요소수 파동 등에서는 우리나라 특유의 공급망 취약성을 겪기도 했다.
한편, 인류의 삶에서 이제 디지털 전환은 더욱 가속화하며 불가역적이 되고 있다. 모두 평범한 일상 속에서 국경을 넘나들며 데이터를 생산·교환하고 미디어를 경험한다. 디지털 통상이 갈수록 중요해짐에 따라 각국의 정책 당국자들은 이를 통상협정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를 두고 머리를 맞대고 있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안면인식 기술 등 디지털 분야에서 중국의 기술굴기는 인권 등 다른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미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통해 디지털 통상규범의 표준을 제시한 이후 선도국들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미국·멕시코·캐나다 무역협정(USMCA), 미국·일본 디지털무역협정,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 등 자유무역협정(FTA) 혹은 다른 형태로 새로운 디지털 통상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 네트워크를 활용한 별도의 ‘디지털 실크로드’를 구축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지난해 말 싱가포르와 디지털동반자협정을 타결함으로써 이 분야에서 겨우 첫걸음을 뗐다.
새로운 의제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지만 다자무역의 본산인 WTO 체제에서 이를 다룰 수 있는 리더십은 부족하고, 전통적인 FTA들도 이를 커버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개념의 통상협정이 등장하는 것은 불가피한 흐름으로 보인다.
현시점에서 우리 국익을 위해 국제통상의 측면에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과제가 CPTPP 가입이며, 또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 참여하는 일이다.
CPTPP는 2017년 1월 미국이 TPP에서 탈퇴한 이후 일본 주도로 2018년 말 발효된 메가 FTA로서 장래 태평양 지역 공급망 재편의 중심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IPEF는 지난해 10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제안한 것이다. 지나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이 IPEF에 대해 “우리는 통상적인 FTA를 그리고 있는 게 아니다”라고 설명한 것처럼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전통적인 통상협정과는 다른 새로운 경제 질서의 탄생이 예고되고 있다. 두 협정은 전통적인 무역 촉진뿐 아니라 디지털 경제와 기술의 표준, 공급망 회복, 기후변화, 노동 등의 분야에서 역내 동맹 및 파트너 국가들과 국제표준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IT 강국, 디지털 강국이라고 자부하지만 높은 중국 의존과 공급망 위기에 유난히 취약한 우리나라가 외면해도 되는 협정들이 아니다. 곧 출범할 윤석열 정부가 현 국제환경을 ‘경제안보 시대’로 규정하면서 주요 글로벌 무역협정 참여를 포함한 국제공조를 확대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러한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시의적절한 전략이다.
문제는 추진 속도다. 우리 정부가 2013년부터 TPP 참여의 유불리를 따지기 시작한 이후 9년이 흘렀다. 참여를 결정하는 절차에만 이처럼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애초부터 우리 스스로 CPTPP가 중국 봉쇄 성격이라는 명확하지 않은 프레임에 갇혀 소극적으로 접근한 탓이 크다. 중국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대외정책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사이 봉쇄의 대상이라던 중국은 물론 ‘하나의 중국’ 원칙 때문에 가입 전망조차 불투명한 대만, 그리고 대서양 국가인 영국마저 가입을 신청하였다. 이들 국가의 가입 신청이야말로 우리나라 대외정책 결정 과정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할 뿐 아니라 CPTPP의 전략적 가치를 웅변하는 상징이 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 경제가 선진국 수준에 도달한 것은 결국 여러 분야 정책들이 조화를 이뤄가며 적극적으로 추진된 결과로 통상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60년대 이후 굵직한 통상협정들이 해외시장 개척을 촉진하면서 경제성장에 기여하였다. 주요 고비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던 ‘시기상조론’을 극복하면서 GATT 가입, 우루과이 라운드, OECD 가입, 한미 FTA 등을 이루어낸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는 미국, EU, 중국이라는 거대 경제권 모두와 FTA를 체결한 유일한 국가였다. 하지만, 최근 수년간 정부가 CPTPP 등 무역협정과 여러 다자·소다자 지역협의체 가입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번번이 실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큰 원칙에 관한 문제, 그리고 국익을 좌우하는 주요 사안일수록 결정을 미루고 침묵하거나 좌고우면하는 우리 국정 운영방식의 산물이다.
주요한 통상협상은 의제가 방대하고 다수 국가가 참여하는 만큼 여러 행정부를 거치면서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NAFTA의 경우 공화당의 레이건 대통령이 제안하고 조지 H. W, 부시 행정부가 협상·체결하고 민주당의 클린턴 행정부가 의회 승인을 마무리하였다. 크게 보면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통상협정이 선거에서 자기 진영에 유리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국익이라고 판단할 경우 한 단계씩 진전시켜 나갔다. 자신의 임기 내에 할 수 있는 일은 마무리하고 남은 일은 차기 정부에 넘기는 식으로 책임을 완수하였다. 우리의 경우에도 한미 FTA에서 그런 과정을 거쳤고, 많은 부분이 노무현 정부의 치적으로 남았다. 하지만 한미 쇠고기협상의 경우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다음 정부로 처리를 미루는 바람에 이명박 정부가 큰 곤욕을 치르면서 국정 동력을 상실하는 아픔을 겪었다. 누구의 이익도 아닌 국익 손실로 이어졌을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통상정책에 대한 우리의 여론도 많이 성숙해졌다. 체결과정에서는 찬반 의견이 치열하게 대립하다가도 일단 발효되고 시행에 들어가면 반대 여론은 잠잠해졌다. 통상협정의 이익에 대한 학습효과 때문일 것이다. 앞선 여러 협정이 증명한 것처럼 관련 산업의 피해는 가입을 늦춘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피해 산업에 대한 보상 절차에 대해서는 오래전 국민적 합의를 거쳐 법률로 마련한 바 있다. 일부 산업의 피해가 있더라도 계속 협정 바깥에 머물러 있을 때의 불이익과는 비교할 수 없다.
태평양지역 주요 통상국가인 우리나라가 CPTPP에 가입하지 않는 것은 제자리걸음이 아니라 퇴행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가입 절차를 서둘러야 한다. 최근 정부가 CPTPP 가입을 신청하고 IPEF에도 참여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관련 산업과 일부 정치인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임기 내에 이 과제를 마무리함으로써 현 정부의 성과로 남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