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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un Brief [미투 운동, 여성의 아픔에 공감을] 통권147호
 
2020-07-22 16:15:11
첨부 : 200722_brief.pdf  

Hansun Brief 통권147호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몇 년 전 어느 유명 연예인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다섯 살 무렵 한옥에 살았는데 두어 살 위인 형과 함께 놀다가 집 아래 지하 공간에 빠졌다. 그가 빠져 들어간 틈은 좁았지만 컴컴한 지하 공간은 무척 넓었다. 자신이 스스로 빠져나오거나 어린 형이 꺼내주기는 불가능한 구조였다. 그 안에서 울어봤자 밖에 있는 어른들에게 들릴 것 같지도 않았다. 그때 형이 온 집안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울었다. 어린 데다 당황까지 한 형은 어른들에게 달려가서 구조를 요청할 생각도 못한 것이다. 하지만 형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어른들이 동생을 구해냈다. 만일 그때 형이 두려움에, 혹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혼자 다른 곳으로 가버렸더라면 그 동생은 지하실에서 지쳐 목숨을 잃었고 시신조차 영영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연예인이 강조한 것은 함께 울어주는 것의 중요성이었다.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자신과 함께 울어주는 일밖에는 없었지만 그 행위가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다.

 

1. 함께 울어주는 것의 중요성

세상을 살아가면서 함께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실감할 때가 가끔 있다. 그리고 함께 울어주기만이라도 바라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도 느끼곤 한다. 최근 유명 정치인의 자살 사건은 많은 사람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4년여의 긴 시간 동안 고통을 받아왔던 피해자가 이 사건을 세상에 내놓은 것은 사람들이 자기 편이 되어 함께 울어주길 바란 마음 아니었을까?

 

일단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을 해보자. 자신이 모시는 나이 많은 상사가 어느 날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고 쳐보자. 만일 전철 안에서 생판 처음 보는 늙수그레한 남자에게 같은 행위를 당했다면 당장 큰소리로 외쳤을 것이다.

이거 뭐 하는 짓이에욧?”

하지만 자신의 인사권자이고 어쩌면 평소에 존경했을지도 모르는 상사가 자신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했을 때 대뜸 이렇게 대처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그분의 단순한 실수였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행위를 싫어함을 완곡히 밝힌다. 그리고 자신의 의사를 그분이 받아들여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태가 나아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가능한 한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보안을 유지하면서도 그분의 행위를 멈추도록 해줄 사람을 찾아가 호소한다. 도와달라고, ‘그분이 추행을 멈추게 해달라고. 안 되면 다른 부서로라도 보내달라고.

 

그 호소를 들은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남자라면 뭐 그까짓 일 가지고 그러느냐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이다. 여자라면 조금만 참아라. ‘그분이니까라고 말하며 역시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았을 것 같다. 누구라도 그분이 문제적 행동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더라도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을까하는 논의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피해자는 심신이 피폐해지면서 4년이 흘러가버렸다. 그리고 참다못해 바깥 세상에 얘기하자마자 그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애도하는 많은 사람이 피해자를 가해자로 바꾸려고 덤볐다. 이른바 2차 가해가 시작된 것이다. 피해자가 아니라 피해호소인이라는 생소한 말도 등장했다. 그녀가 피해자가 되면 그분이 가해자로 못이 박히기 때문에 얼버무려 만든 말이다. 4년 동안 왜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나서느냐고 비난한다. 그럼 처음 그런 일을 겪자마자 미투!”라고 외쳤길 바라는 건가? 그랬다면 파국은 좀 더 빨리 왔을 것이다. 그걸 바라고 하는 말들일까? 그나마 4년이라도 기다려준 것이 오히려 그분에 대한 예우였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

‘4이나 추행이 계속되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다음의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4년 동안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분4년이 지나도록 왜 추행을 멈추지 못했을까? 4년이 되도록 측근들은 왜 그분의 추행을 저지하지 못 했을까?

2. 여성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 먼저다.

아무튼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세상을 등진 사람에 대하여는 당연히 안타깝다. 그러나 아직도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가해자가 목숨을 끊었으므로 공소권 없음이 되었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법으로 그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가해자는 목숨을 끊은 그 사람 혼자가 아니다. 수많은 공범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녀가 고통을 호소했는데도 묵살한 사람들은 물론, 지원한 적이 없는데 그녀를 비서실로 뽑아간 사람, 여비서가 내실의 민망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둔 사람, 그런 시스템과 관례를 만든 사람들, 알고도 방관한 사람들까지 모두 공범이라 할 수 있다. , 그녀를 비난하며 2차적 가해를 가하는 사람들도 공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어떤 범죄든 사회 전체가 그 범죄의 잔학성이나 폐해에 대해 공감하고 인식하지 않으면 같은 범죄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그 범죄가 나쁜 것이 아니라 피해자 혹은 피해호소인이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상태에서 어떻게 범죄를 척결할 수 있겠는가?

 

분명한 것은 그녀가 가해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확실히 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사람은 여성들이다. 그리고 수많은 여성 단체이다. 대부분의 남자는 미처 생각지 못하는, 성적 수치심을 겪는 고통을 여성이니까 공감할 수 있다. 어머니로서 딸 같은 젊은 여성에게 지속적으로 가해진 추행이 얼마나 나쁜 행동인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 그녀를 비난하는 2차 가해에 동참한다면 그 무지함 혹은 저의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라면, 여성이라면, 어머니라면,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여성단체라는 간판을 걸었다면 당연히 가장 먼저 여성 피해자의 아픔을 들여다봐야 한다. 리고 함께 울어주고 우선 그녀를 컴컴한 지옥 같은 곳에서 구해내야 한다. 그녀의 안전을 확보한 다음에야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제대로 가릴 수 있다. 만일 이런 것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맹수나 파충류가 우글거리는 정글과 다름없는 곳이 될 것이고, 여성들은, 아니 부모의 딸들은 그런 험한 곳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피해자가 2차 가해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더 나아가 가해자로 비난받는 모습을 보고, 특히 이 일에 침묵하는 여성단체들을 보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여성단체들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여성인가, 아니면 진영인가? 이미 해묵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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