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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2019년 9월의 한국 -내 탓이로소이다
 
2019-09-30 14:06:17

◆ 한반도선진화재단의 후원회원이신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의 아시아경제 칼럼입니다.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

제가 다니던 중학교의 정문에 들어서면 이런 단어가 새겨진 돌이 서 있었습니다. 이 세 단어를 아우르는 한 단어를 찾지 못하다가, 작년 6월 중국 지린대(吉林大) 리샤오(李曉) 교수의 졸업 치사(致辭)에서 찾았습니다. 그가 학생들에게 당부한 것은 ▲학습능력 ▲독립적 사고 ▲스스로 선택 ▲심미(審美)능력 ▲어려움 극복 ▲사명감 등 6개입니다. 이 치사는 중국 내에서 많은 반향을 일으켰고 심지어 미국첩자라는 비판도 받았다는데, 지금의 중국에도 바른 말을 하는 학자가 있는 것에 내심 놀라면서 ‘지성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겁니다.

지식, 지혜, 지성이라는 세 단어는 흔히 쓰지만 모두가 공감할 정의(定義)를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공부한 건설사업관리에서는 지식체계(Body of Knowledge)가 매우 중요합니다. 즉, 지식은 체계적 전문성이라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지혜(Wisdom)는 사리분별력으로 이해하는데, 솔로몬왕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한 아기를 두고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에게 반씩 나눠가지라고 판결하자 “저 여인에게 주라”고 한 여인이 진짜 엄마이었던 것이죠.

20세기 최고의 지성은 버트런드 러셀이라는데 별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한국인으로는 김준엽 선생을 생각합니다. ‘열린 자세와 도덕성’ 또는 ‘행동하는 양심’이란 정의가 어떨까요. 얼마 전 공학한림원에서 통일 관련 조찬모임이 있었는데 김일성대학교에서 수학과 교수를 하던 여자분이 패널로 나왔습니다. 탈북을 하고 지금은 서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학자로서의 기개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972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건설 당시 제가 감독하던 현장에서 야간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연세 든 목수 한 분이 정말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쉬엄쉬엄하시지요” 했더니 “나는 못 배웠지만 이 학교는 잘 짓고 싶다”라는 말을 하더군요. 평생 잊히지 않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지성인이라는 단어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서양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싫어하는 단어는 거짓말쟁이(Liar)와 비겁자(Coward)입니다. 요즈음 한 사람의 도덕성 때문에 몹시 시끄럽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법학을 가르치는 교수의 신분으로 법무부 장관이 되고 나니 더 시끄럽습니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옥살이를 하고, 학생들에게 정의를 가르친 사람이기에 더 시끄럽습니다. 국민들은 그에 대하여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면서 배신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잘 생긴 그의 외모 때문에 더 배신감을 느낀다고도 합니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은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기 위한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외모 뿐 아니라 말과 글, 판단력 등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이목구비가 번듯하다는 이 사람의 과거 말과 글들이 지금의 행실과 너무 다르고, 본인과 주변의 부도덕함이 드러나고 있어서 신언서판의 기준으로 보면 장관자리는 매우 부적절합니다.

잘 생긴 외모에다 교수생활도 하고, 사회개혁에 몸을 던지고, 장관도 했던 사람이 다른 나라에도 있었습니다.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체 게바라입니다. 당시 남미의 비약적 경제발전의 뒷면에 빈부격차와 노동착취가 심한 것을 보고 마르크스주의에 공감하여 24세에 볼리비아 인민운동에 뛰어듭니다. 수많은 투쟁을 거쳐 쿠바 혁명정부 각료로 있다가 어느 날 홀연히 떠나 다시 볼리비아 게릴라전에 참여하던 중 정부군의 총에 맞아 39세로 생을 마감합니다. 당시 국법은 어겼어도 개인적 부도덕 같은 기록은 없습니다. 지금도 그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공교육과정을 거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전혀 다른 성향으로 성장해 갑니다. 스스로를 ‘행동하는 양심’으로 행세하며 길거리에서 마이크를 잡는 모습을 너무 흔하게 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되고,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인격이 되고, 인격은 운명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이 운명을 가른다는 것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의 앞 부분에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구절이 붙어있습니다. 사물의 궁극적 이치를 파고 들라는 뜻입니다. 어설피 아는 지식이 생각을 망치고 결국에는 자신은 물론 나라의 운명까지 망치게 됩니다.

보수는 균열로 망하고 진보는 자충수로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보를 자랑스럽게 여기던 그들도 부패와 균열의 길에 있었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유착하고, 권력이 부패하는 이유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때문이라고 선동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체제는 불완전하고, 모든 조직은 부패합니다. 권력의 속성은 탐욕이고, 탐욕은 인간의 본능이고, 본능은 이기적인 유전자의 대물림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그나마 실상이 공개되고, 공유되고, 견제되고, 교체될 수 있지만, 공산주의나 전재 독재는 감추어지고, 왜곡되고, 공포(恐怖)화하기 때문에 훨씬 더 부패했음이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증명되었습니다.

올해는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주년입니다. 아직도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든다”는 선동으로부터 깨어나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소련은 70년이 걸렸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몇 년이 걸릴까요? 우리 대통령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요. 통일입니까, 공존입니까. 누구와 어떻게 공존합니까.

법무부장관에게는 열렬한 지지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더 이상 우상이 아니며, 더욱이 순교자로 만들면 안 됩니다. 진실을 밝혀서 무너져내린 이 나라의 도덕성을 다시 세우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역사를 뒤져 남의 탓으로 돌리는 짓은 그만 해야 합니다. 역사가 바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심성만 비겁하게 됩니다. 알베르 카뮈는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망보는 사람’을 지성인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우리가 못나서, 아니 내가 못나서 수모의 역사를 만들었음을 인정하고, 당당한 나라를 만드는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4차산업혁명의 진정한 위기는 기계에게 인간의 자리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인간소외 문제의 답을 우리 젊은이들이 찾도록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컴퓨터 자판 앞에서 쩔쩔매는 주제에 정의와 합법을 가장한 선동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온 세상의 Z세대들이 이 땅에 와서 함께 일하고 신명나게 노는 나라를 만들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게 그나마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지금의 혼돈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는 전적으로 국민의 수준에 달렸습니다. 우리가 할 탓입니다. 아니 내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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